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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연극계는 ‘미투(#MeToo)’ 운동으로 뜨거웠다. 연희단거리패를 이끌던 유명 연출가 이윤택씨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전직 단원 등의 증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성추행을 넘어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연극인들의 모임 게시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이씨 외 또 다른 가해자들의 성폭력을 증언하는 글도 잇따랐다. 피해자들은 수업이나 연기지도를 빙자한 성희롱,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의 성추행 사례 등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연쇄 성폭력 범죄 사실이 최근 폭로되기 시작한 연극 연출가 이윤택.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윤택씨가 저질러온 성폭력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씨는 연희단거리패 시절 여성 배우들을 심야에 극단 별채인 황토방으로 불러 부적절한 안마를 시켰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배우 개개인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작용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해자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연출가로 승승장구했으니 기막힐 따름이다.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의 용기있는 ‘미투’가 없었다면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씨는 그동안 연희단거리패 뒤에 숨어 ‘간접 사과’로 일관해왔다. 추가 폭로가 계속되고 비판이 거세지자 뒤늦게 19일 공개 사과를 하기로 했다. 한국연극협회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가해자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를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당연한 조치들이지만 충분치는 않다. 이씨의 행태는 고백과 사과로 용서받을 수준을 넘어섰다고 본다. “스스로 벌을 달게 받겠다”(14일 경향신문 인터뷰)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사를 자청해야 옳다. 연극협회도 철저한 진상규명 작업은 물론 연극계 전반의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위계서열 문화를 청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난달 말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며 불붙은 반(反)성폭력 운동은 법조계·기업·문학계를 넘어 연극계로까지 확산됐다. 이는 성폭력이 특정 분야나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말해준다.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모든 조직에 상존하며,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음을 일깨운다. 연극계를 넘어 또 다른 분야에서도 ‘미투’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피해자들은 ‘강요된 침묵’에서 벗어나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회는 이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정부는 제도적 차원에서 응답을 내놓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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