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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귀가 멍하여 지난 주말에는 멍하니 보냈다. 병원에 갔더니 ‘중이염 초기’라고 했다. 흔히 ‘감각의 기만’을 얘기하지만, 오감(五感)은 피상적인 채로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경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귀가 안 좋으니 많은 게 실감나지 않았다. 들을 수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사실 지난 10여년간 음악이 없었더라면, 내 삶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특히 고전음악은 가장 평화롭고 깊이 있는 위로를 준 듯하다.
그 가운데 지난 2~3년 즐겨 들었던 것은 피아노곡이었던 것 같다. 여러 작곡가와 장르가 있지만, 거듭 들은 것에는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슈베르트의 ‘즉흥곡’ 그리고 슈만의 피아노곡들이 있다. 니콜라예바가 연주하는 이들 곡은 어느 것이나 좋다. 루빈스타인의 브람스 ‘피아노 4중주’도 내 몸처럼 곁에 있다. 하지만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협주곡’이다.
피아노 555대의 하모니 l 출처:경향DB
몸이 지치거나 세상일이 복잡하게 여겨질 때, 하루 일이 끝나거나 주말이면 나는 습관처럼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다. 모차르트든 베토벤이든 라흐마니노프든 바흐의 건반음악이든 다 좋아한다. 그러나 가장 즐겨 듣는 ‘피아노 협주곡’은 베토벤의 다섯 곡 가운데 ‘4번(op.58)’, 브람스의 ‘1, 2번’ 그리고 쇼팽의 ‘1, 2번’이다. 어떻게 그리 엄격하면서도 풍성하고,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과감할 수 있으며, 유연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은 계속되는 선율 속에서 한 고리를 이루며 다음 선율로 나아간다. 어느 것이나 깃털처럼 여린 것으로부터 폭풍처럼 세찬 것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규모의 건축적 구조를 선율로 그려낸다.
한때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만 리히터(S. Richter)나 길렐스의 연주로 반복해 듣다가, 미켈란젤리나 루빈스타인의 연주와 비교해 듣기도 했다. 폴리니나 침머만도 훌륭하다. 그것은 철학적이면서도 전원시 같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도 그렇다. 이들에게 서정성과 깊이, 절제와 자유는 별개가 아니라 선율의 화음 속에 통합돼 있다. 진정 위대한 예술은 많은 대립적 요소를 조화시킨다고 했던가.
음악의 매 순간은 드러나거나 숨은 리듬을 탄다. 세계가 보이는, 보이지 않는 리듬으로 차 있다면 음악가는 이 세상에서의 경험을 선율로만 표현하는 사람이다. 소리의 장단과 강약과 높낮이와 속도로 온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니. 음악가만큼 현실을 섬세하게 느끼고 세계와 깊게 화응하는 이는 없는 듯하다. 그들은 최상급 상태를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창조하는’ 것이다. 이 세계와 만나려면 신중해야 하고, 침착함 속에서 삶의 바닥에서부터 천상의 저 끝까지 나가야 한다. 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침잠 가운데 세계의 깊은 흐름과 우주의 숨은 질서에 닿아 있다는 뜻일까. “음악의 본질은 우리를 세속적인 것보다 더 높게 고양시키는 힘에 있다”고 포레는 썼다. 이것은 거장의 연주에서도 확인된다.
뛰어난 연주자는 아예 눈을 감거나 허공을 쳐다보며 무심하게 연주한다. 이것은 스스로 리듬을 타고 즐기며 누리지 않으면 안된다. 때로는 열 손가락이 열 개의 다른 건반을 ‘동시에’, 그것도 1초에 서너 번씩 치며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세계는 베토벤의 것이면서 베토벤을 연주하는 리히터의 것이기도 하고, 리히터를 넘어 세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소리 속에 세계가 담겨 있고, 선율 속에 음악가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그 신중함과 추진력, 집중력과 비애감은 무시무시하다. 이것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30분쯤 되지만, 브람스에서는 50분이나 이어진다. 한 시간 가까이 감동받을 수 있는 예술장르가 음악 외에 달리 또 어떤 게 있는가?
거장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세계의 가장 깊고도 머나먼 한구석을 건드리는 듯 희열과 경외감을 느낀다. 음악가에게서 나는 전체적 조화에 대한 감각을 배운다. 리듬은 세계에 있으면서 우리 마음속에도 있다. 하지만 오늘의 여기는 얼마나 좁고 얄팍한 것인가. 어지러운 마음이 음악을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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