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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간, 이 나라에선 거짓말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들의 거짓말에 처음엔 화가 났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무감각해졌고, 나중에는 누가 거짓말을 더 잘하는지 따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이 글은 그러니까 내가 선정한 거짓말 왕에 대한 보고서다.

5위. 박근혜 대통령

거짓말의 포문을 연 것은 박 대통령이었다. 이분은 세 차례 간담회와 올해 초의 신년간담회까지, 총 4차례나 거짓말 리사이틀을 벌였다. 심지어 담화 중에 했던 ‘죄송하다’는 말 역시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이분의 순위가 낮은 것은 거짓말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말하긴 쉽다. 자신이 겪은 대로 얘기하면 되니까 말이다. 거짓말은 그렇지 않다. 사실이 아닌 말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알리바이는 물론이고 이전에 했던 발언과 아귀가 맞는지 매 순간 따지지 않으면 안 되니 말이다. 박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겠다는 의욕은 넘쳤지만, 아쉽게도 역량이 모자랐다. 그의 거짓말을 떠올려 보자. 설득과는 무관한, 그냥 우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식의 말에 속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위. 우병우 전 민정수석

우병우는 영주가 낳은 천재다. 늘 1등만 독차지했다. 검사장 인사에서 물을 먹기 전까지 승진에서도 늘 동기들 중 선두를 달렸다. 이런 그를 4위에 놓다니, 우병우가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청문회에서 우병우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어느 한 질문에도 머뭇거림이 없이 척척 대답하는 그를 보면서 “역시 천재구나!”라고 감탄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신은 최순실을 모르고 장모에게 물었더니 장모도 모르더라는 답변이랄지, 2014년 세계일보 보도 이후 정윤회 문건을 수사하지 않은 이유가 검찰 수사에서 허위로 판명났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그 백미였다. 하지만 그의 거짓말은 타고난 재능이 아닌, 벼락치기 공부에 의해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청문회장에서 답변하는 우병우를 보고 있노라니, 예상질문을 다 뽑고 그에 따라 무수히 연습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4위가 맞다.

3위. 김경숙 전 이화여대 학장

부끄럽게도 난 청문회 전까지 김경숙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청문회 이후 난 그의 팬이 됐다.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진짜같이 하는지. 김경숙은 시종 당당했고, 국회의원과의 말싸움에서도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장제원 의원이 “답변 듣지 않겠다”고 해도 계속 답변을 하는 패기를 보라! 교육부 감사에서 다른 이가 했던 증언을 들이대도 “사실무근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김경숙의 표정은 거짓말의 달인이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줬다. 감히 말하건대 이건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올해 특검에 나갈 때 보여준 초췌한 모습은, 내가 그의 팬이 된 걸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줬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2위.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조윤선의 거짓말은 위에서 열거한 이들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질문 요지와 무관한 답변으로 질문자로 하여금 뒷목을 잡게 했는데, 심지어 자신이 방금 인정한 얘기를 재차 물어봐도 엉뚱한 답변을 하는 장면은 신기 그 자체였다. 우병우에게마저 “식사하셨습니까?”라는 따뜻한 말을 건넸던 김경진 의원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막말을 해버렸다. “어이 장관! 몰랐어, 알았어?” “언제 어떻게 확인했냐고! 계속 물어보는데 그 답변을 못해?” 조윤선이 블랙리스트를 인정하도록 만든 이용주 의원은 그 답변을 얻기 위해 같은 질문을 17번이나 해야 했는데, 조윤선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이 의원의 생명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1위. 김기춘 전 비서실장.

위에 열거한 분들도 다 쟁쟁한 분이지만, 그래도 최고는 김기춘이다. 최순실을 아느냐는 질문에 그는 “알지 못합니다. 만난 일도 없습니다. 통화한 일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는데, 리듬을 붙여 노래하듯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거짓말을 즐긴다는 얘기다. 물론 그는 만사를 모른다고 답했다. 이건 거짓말 하수들의 우기기 전략일 수 있지만, 그의 뛰어난 점은 다른 이들과 달리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점이었다. 간첩사건을 조작하면서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했다면 제 자신이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쯤 되면 거짓말탐지기를 써도 잡아내지 못할 것 같은데, 지난 40년 동안 거짓말을 하다 보니 삶 자체가 그냥 거짓말이 된 것 같았다. 아쉬운 점은 그가 나이가 많아 거짓말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정유라가 있다. 아직까지 보여준 게 많지 않은 유망주이지만, 20대 초반에 벌써 이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게 강점이다. 유망주에겐 좋은 스승이 필요한 법, 정유라가 귀국한다면 김경숙, 조윤선, 김기춘과 한방에 수감하자. 일찍부터 이들에게서 배운다면 장차 김기춘을 뛰어넘는 인물로 자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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