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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말을 못한 분은 누구일까? 대부분 503호에 계시는 그분(이하 GH)을 떠올리겠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도 결코 만만한 분은 아니다. 말 못하는 걸 남들이 알아챌까봐 대선 전 토론회에 한사코 불참했을 정도인데, 특유의 사투리까지 결합돼 정체불명의 문장이 탄생하곤 했다. 정말인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주도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강간도시로 만들겠습니다”라든지 ‘결식’이라 해야 할 것을 ‘걸식아동’이라 하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래도 내가 GH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는 YS는 그래도 문장의 기본은 갖춘 반면, GH는 한 문장에 주어, 동사, 목적어가 여러 개씩 뒤섞여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GH는 수첩이나 프롬프터가 없으면 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인터뷰도 예정된 질문이 아니면 받지 않았다. 지금 GH가 재판 도중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것도 예상을 벗어난 질문이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러서트_ 김상민 기자

정치인이 말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정치가 설득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설득은 동료 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기자나 국민을 상대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YS나 GH가 실패로 끝난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말만 잘한다고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말에 어떤 콘텐츠가 담기느냐이지, 화려한 언변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보자. 그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012년 대선 토론회 때는 그 말 못하는 GH를 압도하지 못했고, 이번 대선 때도 그의 말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국민의당 안철수는 말을 못하는 게 자신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산 출신답게 사투리가 섞여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는 말을 매끄럽게 잘하진 못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대선 때 안철수는 달라진 목소리로 대중 앞에 섰다. 웅변학원을 다녔다는 설이 돌기도 했는데, 본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독학으로 복식호흡을 익히며 굵은 목소리를 익혔다.” 그 결과 안철수가 더 행복해졌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대선에서 홍준표에게도 뒤진 3위에 그쳤다. 그건 목소리 문제가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을 하는 대신 오직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인의 얼굴만 보였으니까. 객관적으로는 바뀐 목소리가 더 좋을 수 있었지만, 거부감을 느꼈다는 반응이 더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가 정치인으로 인기를 끌었던 과거를 돌이켜 보자. ‘무릎팍도사’에서 그는 어눌한 말투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50%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5%에 불과하던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던 장면도 감동이었다.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몰락하기 시작한 건 국민들이 그의 입을 바라볼 때 늘 침묵으로 일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늘 새 정치를 입에 올렸지만, 그가 말하는 새 정치가 무엇이냐에 대해 속시원하게 설명한 적은 없다. 일부에선 그에게 ‘간철수’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행동은 안하고 간만 본다는 뜻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 왜 제 입장을 발표하지 않느냐는 말이 많습니다만, 지금 저는 여러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한쪽의 의견만 듣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것이니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 제가 입장표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유력 대선 후보다 보니 입장표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여러 의견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제 입장은 추후에 발표하겠습니다.’ 매사 이렇게 한다면 지지자들도 답답해하지 않겠는가?

다들 알다시피 국민의당은 지금 존폐위기에 몰렸다. 대선 때 국민의당이 제기한 문 대통령 아들 의혹이 사실은 조작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는 게 드러나서다. 조작의 주범인 이유미는 이미 구속된 상태고, 이준서 전 최고위원을 비롯한 당 윗선까지 수사가 확대되고 있다. 당에서 꾸린 진상조사단은 이유미의 단독범행을 주장하지만, 그걸 믿는 국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설령 단독범행이 맞다 해도,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덜컥 발표한 건 명백한 잘못이다. 이미 밝혀진 사실만 가지고도 석고대죄를 해야 마땅하지만, 당 중진들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당 지지율이 꼴찌로 추락한 건 당연한 귀결. 하지만 이 사태와 관련해 안철수는 또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직책이 어떻든 국민의당은 안철수의 당이다. 사람들은 이용주나 박지원의 해명보다, 그의 사과를 듣고 싶어한다. 이 사과를 하는 데 무슨 대단한 화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무릎팍도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솔한 사과와 함께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만 말하면 된다.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서 새 정치를 입에 올리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치인으로서 안철수의 생명선은 짧아지고 있다. 궁금하다. 이럴 거면 목소리는 도대체 왜 바꾼 것인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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