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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도시에 사는 아들 녀석한테 안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요즘 무슨 일 하세요? 땀 너무 많이 흘리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세요. 이웃들도 잘 지내시지요?” 내가 만일 도시에 살고 있었다면 아들 녀석이 어찌 이웃들 안부를 묻겠는가. 그리고 농촌을 오직 ‘관광 대상’으로 여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불어닥쳤을 때도 참으로 많은 분이 안부를 물어봐 주었다. 집과 농작물은 무사한지, 힘든 일은 없는지, 산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잘 있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관심을 갖고 물어봐 주었다. 이렇게 위로와 응원이 가득한 안부 전화를 받고 나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고, 없던 힘도 절로 생긴다. 더구나 “요즘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어봐 주는 아들 녀석이 참으로 든든하고 고맙다. 

며칠 전에 아들 녀석은 2박3일 동안 시골집에 머물다 갔다. 갓 돌 지난 손자 녀석 돌보느라 아들과 며느리가 하루 내내 매달려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는, 문득 마을 할머니들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도시 사는 며느리 오거들랑 절대 농사일시킬 생각 하지 말거래이. 아무리 농사일 바쁘고 일손이 모자라도 겉으로는 일 없다고 해야 한대이. 땅콩과 밤을 맛있게 삶아 놓을 테니 좋은 공기 마시며 산책이나 하고 오라고 해. 그래야 다음에 또 오지.” “농사일이고 부엌일이고 이런 거 시키모 두 번 다시는 안 온대이. 그라고 도시에서 하루하루 묵고사느라 고생하는 거 생각하모 안쓰럽잖어.”

아들 녀석은 2박3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가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고 산밭으로 가는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해보다 먼저 일어나 산밭에 쪼그려 앉아 김장배추 벌레를 잡고, 한 자리에 서너 개 올라온 가을무를 솎고, 아침밥 먹고 쉴 틈도 없이 비지땀을 흘리며 마늘밭을 갈고, 옥수수와 가지를 따고, 땅콩을 캐는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고구마줄기와 호박잎을 따서 된장국을 끓이고, 옥수수와 땅콩을 삶는 어머니도 보았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돌 지난 아들 녀석 입가에 묻은 밥알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지 못하고, 제 입으로 넣었을 것이다. 

나는 해 질 무렵에 땅콩을 뿌리째 뽑아서 아들 녀석한테 보여 주었다. “아버지, 땅콩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리는 줄 알았어요. 땅속에서 이렇게 주렁주렁 달리는 걸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나이 서른아홉이 되어서야 땅콩이 땅에서 열린다는 걸 알게 된 아들 녀석을 보면서 내가 별을 노래하는 농부가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내가 농부가 되지 않았으면 아들 녀석은 땅콩을 오직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물건’으로 여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별을 노래하는 농부가 되었다는 게 자식들한테 아니, 자손 대대로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성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직이라는 농부, 박노해 시인 말처럼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그분 앞에선 감히 이름도 못 내민다’는 농부인 아버지를 우리 아들(젊은이들)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농사를 이어받아 주면 좋겠다.

<서정홍 농부 시인>

 

 

연재 | 시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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