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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봐도, 4·27 남북정상회담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처음 명문화한 ‘판문점선언’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은둔했던 과거 북한 최고지도자들과 달리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등 국제사회로 나왔다는 것도 새로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나는 이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좋은 길동무가 됐다”는 문재인 대통령 만찬 발언이었다.

문 대통령의 말은 단순한 정치적·외교적 수사로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도보다리 단독 벤치회담을 본 뒤끝이었기 때문일까. 두 정상이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가 핵심이겠지만, 카메라에 비치는 두 정상 모습에서 서로에 대한 인간적 호감과 이해가 느껴졌다. 하루 종일 회담을 지켜보며 차곡차곡 쌓였던 긴장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한순간에 풀어졌다.

정상외교도 결국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이다. 국가 최고책임자 사이의 관계는 물론 공식적인 것이지만, 그 못지않게 인간적 신뢰가 관계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도보다리 위에서 보여준 모습이 진짜라면, “좋은 길동무가 됐다”는 문 대통령 말에 김 위원장도 공감한다면, 앞으로 남북관계를 낙관할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들었다.

정상 간 우정의 중요성은 역사도 증명한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등 100년 동안 앙숙으로 지냈던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에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의 신뢰가 깔려 있었다. 1962년 7월8일 두 정상은 프랑스 랭스 대성당의 미사에 함께 참석했고, 드골은 “아데나워 총리와 나는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다짐하기 위해 왔다”고 성당 바닥에 새겼다고 한다. 1963년 1월22일 양국은 우호조약을 맺었다.

회고록 <드골, 희망의 기억>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1962년 중반까지 아데나워와 나는 서로 40여차례나 서한을 교환했다. 우리가 만나기도 15회. … 회담 100시간, 단독형식이 아니면 때로는 우리 장관들을 대동시키기도 했고, 우리 가족들을 동반해서 가기도 했다. … 프랑스의 원수와 독일의 원수는 (랭스 대성당) 라인의 양편에서 우정의 과업으로 영원히 전쟁의 불행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 위대한 나의 벗이 서거할 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함없는 우정과 한결같은 자세로 계속되었다.”

물론 김 위원장의 비핵화 행보에 대한 비난과 의심이 있다. 자유한국당은 위장평화쇼라고 비난한다. 집권 기간 동안 4차례의 핵 실험, 90여 차례의 미사일 시험발사 등 김 위원장이 보여온 행보를 고려하면 이런 의심과 비난들은 어쩌면 피해갈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고모부와 형을 죽였다는 패륜아 이미지도 섣불리 마음을 열기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가 어떻든, 비핵화 행보의 의도가 무엇이든,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보여줬던 태도는 진심이기를 희망한다. 둘의 관계가 드골과 아데나워 관계 이상으로 인간적인 것이 되기를 기대한다. 비핵화 과정에서 남북의 이해관계와 주장이 엇갈리더라도, 얼굴을 붉힐 사건이 터지더라도, 인간적 믿음이 깔려 있다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남북 정상의 핫라인이 늘 분주했으면 좋겠다. 요즘 말로 ‘브로맨스’가 생겨도 좋을 것이다.

며칠 전 점심을 함께한 이부영 전 의원의 말이 귀에 꽂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북한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문 대통령이 뭐라고 한 줄 기억하나. ‘한반도에서 우리의 동의 없이 어느 나라도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었어. 전시작전통제권도 없는 한국 대통령이 ‘우리의 동의 없이’라며, 미국 대통령의 최후통첩을 (감히) 가로막고 나선 거야. 그때 트럼프 대통령은 ‘선제공격을 곧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섰고. 아마 김 위원장은 그때부터 문 대통령과 무언의 신뢰를 나누게 됐을 걸세.”

올가을 평양 정상회담은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4·27 회담 때 북측에서 ‘평양냉면’을 공수했으니, 평양 정상회담 때는 남쪽 음식으로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은 어떤가. 잔칫집에 초대받은 이웃사촌이 음식을 보태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문 대통령이 ‘최고’라고 칭찬했던 돼지국밥도 좋을 것 같다. “어렵사리 부산에서부터 돼지국밥을 가져왔습니다. 멀리서 왔습니다. 허이고, 멀다고 하면 안되겠지요. 허허허”라고 하는 문 대통령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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