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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국내외에서 들리는 소식은 전환기의 위기가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지구 전체가 거대한 화약고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전쟁의 포성이 갈수록 커지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곳이 있다. 백악관이 거둬들이기는 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의 ‘아마겟돈 전쟁’ 발언은 핵전쟁이 공상의 영역이 아니라 실재하는 위험임을 상기시킨다. 크름대교 피폭 후 러시아가 키이우를 보복 공격했다는 한 줄 속보를 접하자 먼저 머리에 스친 것도 ‘설마 전술핵은…’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핵공포가 나와 같은 평범한 생활인의 잠재의식에도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불안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의 위기는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의 삶에 곧장 체감된다. 기후 위기는 지난 8월 역대급 폭우로 서울 등지를 강타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름값과 밥상머리 물가를 밀어올렸다. 미·중 갈등은 그사이에 낀 한국, 특히 주력 업종인 자동차·반도체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최근 한반도는 무력시위의 살벌한 경연장이 되었다. 북한은 하루가 멀다하고 다종다양한 미사일을 쏘고 전투기를 띄우며 도발하고, 한·미 동맹은 항공모함을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거나 군사훈련을 하며 대응하고 있다. 양측이 뿜어내는 화약 냄새가 지금처럼 상호 상승작용을 하며 자욱해질 때 우발적인 사건 하나가 성냥불이 돼 전쟁의 참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얼마 전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군이 대응 발사하다 현무2 낙탄 사고가 발생했다. 민간인이 없는 곳에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민가에 떨어졌거나 휴전선 이북으로 날아갔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찔하다.

기후위기는 산업혁명 이래 인류가 성장해온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미·중 갈등은 탈냉전 이후 30년 넘게 지속돼 온 미국 주도 세계질서의 해체와 재구성이 배경이다. 그 역학이 냉전의 유물인 분단과 난마처럼 얽혀 있는 것이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다. 세계는 수백년 단위, 수십년 단위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전환기에 성큼 들어섰고, 그 첨예한 복판에 한국이 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전환기는 대처하기에 따라 기회일 수도, 위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가르는 것은 국가의 대응 역량이고, 그중에서도 공동체 구성원의 힘과 지혜를 모으는 통합적 리더십의 존부 내지 강약 여부이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약체 리더십이라는 면에서 윤석열 정부는 역대급이다. 집권 초기에 대통령 지지율이 이렇게 오래 바닥에 깔린 적이 없다. 지난달 뉴욕에서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을 놓고 우왕좌왕한 데서 보듯 대통령실과 내각의 보좌 실력은 낙제점에 가깝다. 집권여당 역시 의석수로 보건, 능력으로 보건 역대 최약체다. 당·정·대 어느 곳 하나 나라를 책임있게 끌고간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특히나 문제인 것은 협치나 통합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집권세력의 태도이다. 국정운영을 책임진 세력으로서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기반을 넓히려고 부단히 노력해도 부족할 터에 뺄셈 정치, 갈라치기에 여념이 없다. 여당에선 기어이 이준석을 축출한다. 노란봉투법에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고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 따위 얘기를 예사로 하는 김문수를 경제사회노동위원장에 임명한다. 사회적 대화에 가장 부적합한 인물을 사회적 대화기구의 수장에 앉히고는 “노동 현장을 잘 아는 분”이라고 염장을 지른다. 작정하고 엇나가려고 하는 건가 의심이 든다.

국정 전반이 기능부전에 빠진 와중에 기세등등한 곳이 검찰과 감사원이다. 세계사적 전환기에 검찰과 감사원 이슈로 날을 새운다는 것 자체가 국정운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증좌이다. 사정기관을 사병 부리듯 앞세운 통치는 강한 리더십의 표현이 아니라 약한 리더십의 증거이다. 허약한 정치적 내면을 험상궂게 치장하는 정치적 문신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전환기에 편재한 불안을 잠재울 수도, 시민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다. 진영 간 적대와 사회적 갈등을 심화하고, 공권력의 권위만 땅에 떨어뜨릴 뿐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윤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과 여권의 대응을 보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은 우화를 떠올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화는 교훈적이고 재미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오싹한 호러물이 된다. 지금처럼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전환기에 특히 그렇다.

<정제혁 사회부장 jhjung@kyunghyang.com>

 

 

연재 | 아침을 열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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