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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감싸는 정서는 쓸쓸함이다. 거기에는 1991년 5월 투쟁의 잔해를 응시하는 처연함이 있다.
화자는 92년 초여름, 비 내리는 서울 종로 어디쯤에 있다. 그는 우산을 들고 횡단보도를 분주히 지나는 사람들, 비에 젖은 탑골공원 담장 기와, 고가차도 신호등 위에서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는 비둘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풍경이 상념으로 이어진다.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화자가 종로에서 ‘우리들의 한 시대’를 떠올린 것은 대규모 거리시위가 주로 종로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노래는 종로에서 출발해 구로공단과 봉천동 산동네, 삼각산과 세종로길, 시청광장을 거쳐 비가 갠 종로로 되돌아오는 구조로 돼 있다. 이 관념의 여정을 거쳐 쓸쓸함은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라는 의지 내지 낙관으로 바뀐다. 노래는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르는’ 비둘기의 힘찬 비상으로 끝난다. 그러나 의지가 시대의 공기를 초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이 노래의 낙관은 쓸쓸한 낙관이다. 낙관과 시대적 공기의 간극이 클수록 쓸쓸함이 배가된다. 이런 심층의 아이러니가 있어 이 노래는 울림이 크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교문 앞 시위 도중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5월 정국의 시작이었다.
대학생들의 거리시위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전남대생 박승희, 안동대생 김영균, 경원대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노동자 윤용하가 국가폭력에 항의해 분신했다. 성균관대생 김귀정은 충무로 시위 도중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숨졌다. 수많은 인파가 종로, 시청 앞, 명동, 을지로 일대를 가득 메웠다.
그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분노했기 때문일 터이다. 때는 광주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인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기였다. 어떤 학생들에게 강경대의 죽음은 영상으로 접한 ‘5월 광주’의 추체험 같았다. 그렇게 열린 거리에서 학생들은 아직 영글지 않은 제 신념과 꿈을 나누었다.
5월 정국은 6월3일 ‘정원식 밀가루 세례’ 사건을 거치면서 급속히 식는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91년 5월은 혁명의 기념비가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탈혁명의 시대로 미끄러지는 가파른 경사면의 경계석에 가까웠다. 정태춘이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고 노래한 배경이다.
91년 5월은 90학번 전후 세대가 공유하는 원체험이 되었다. 이 세대가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의 2세대를 형성한 것,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열광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세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층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났다. 그때 거리에 선 청년들은 이제 그만한 나이의 자녀를 둔 중년이 되었다.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가 된 것이다. 젊은 날을 돌아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는 회한이 담기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현재를 자조하는 마음과, 세상과 변화의 주도권이 다음 세대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착잡한 태도가 섞여 있다.
지난 재·보궐 선거 이후 20대와 50대의 인식차가 자주 회자된다. 이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힐 생각이라면 기성세대 스스로 기성세대임을 자각하고 처신해야 한다. 기성세대 엘리트의 기득권은 그것대로 누리면서 ‘정의’ ‘개혁’ ‘진보’와 같은 가치의 해석권을 독점한 양, 변화의 주도자인 양, 순결한 운동가인 양, 정치적·윤리적 교사인 양 행세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적 꼴이 만들어진 데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자성하는 것이 도리이다.
꼰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꼰대인 줄 아는 꼰대라도 돼야 한다. 그래야 제 언동을 살피고, 들으려고 한다. 들으려 한다는 건 누군가 발언할 기회와 공간을 열어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91년 5월 30주년을 맞아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그때 우리만 한 나이의 청년들이 지금 맞닥뜨린 절박한 삶의 처지와 목소리이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애써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정제혁 정책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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