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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구상”이라기보다, 그 길밖에 안 보이기 때문일 터이다. “유승민 의원과 통합 안 하면 자유한국당 미래는 없다.” 친박에게 배신자로 터부되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하 경칭 생략)을 한국당의 미래와 접속시킨 나경원 원내대표는 최소한 솔직했다. 당대표 바뀐 것 빼고는 달라진 게 별로 없는, 외려 거꾸로 퇴행한 한국당이 이대로는 미래(선거 승리)가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서 한국당 지지율은 18%를 기록했다. 6개월 만에 황교안 대표 체제 이전으로 돌아갔다. 철 지난 ‘냉전보수’도 모자라 ‘친일보수’의 덮개까지 쓴 한국당의 퇴화를, 탄핵 2년 만에 당 주류로 복귀한 친박의 존재만큼 위시하는 것도 없다. 한국당의 문제를 기득권·꼰대·웰빙 이미지로 지목한 당혁신위의 진단은 고답적이다. 진단이 엉뚱하면 처방도 돌팔이기 십상이다. 황교안 대표는 선거에서 이기는 “간단한 방법”을 내놨다. ‘3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승민의 바른정당계와 우리공화당을 묶는 통합은 애초 불가능하다. 설령 어찌하여 ‘도로 새누리당’만 되면 무조건 내년 총선과 다음 대선에서 이긴다, 이거야말로 정신승리법이다. 궤멸적 참패를 당한 지난 지방선거가 단순히 보수의 분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선관위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알 수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7일 국회에서 열린 당대표및 최고위원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왼쪽)와 황교안 대표가 7일 국회에서 개최된 당 대표 및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왜 유승민일까. 나경원이 미래까지 거론하며 호명한 건 유승민으로 표징되는 개혁 혹은 합리적 보수의 공간과 이미지다. 황교안 체제에서도 인적 청산 등 혁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렵다는 게 드러났다. 인물도, 이념도, 정책도 죄다 수구적인 한국당은 스스로 외연 확장이 힘들다. 탄핵 전후로 돌아간 지지율이 징표다. 한국당 지지 행위를 ‘쪽팔려 하는’ 중도 보수층을 되돌리지 않고는 선거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 그 ‘쪽팔림’을 희석시켜줄 존재로 유승민이 필요해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 혁신’을 주창했다가 배신자로 찍혀 축출됐고, 탄핵에 참여했고, 여느 보수 정치인보다 사회경제 정책에서 개혁적인 유승민이다. 황교안 다음으로 보수 대선주자 지지율 2위에 올라 있다. 스스로 고쳐쓰기 불능인 꼴통보수의 변화 코스프레를 포장하기 위해 이만한 재료가 없다. 친박의 거부감을 모를 리 없는 나경원이 당의 미래까지 들먹이며 유승민을 스토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남은 재산 정리를 둘러싼 추한 싸움으로까지 비춰지는 바른미래당의 내전으로 옹색해진 유승민(계)의 처지가 그 스토킹을 거리낌 없게 만들었을 게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기득권 양당구도를 강요하는 힘은 맹렬해진다. 더욱이 ‘3당’ 바른미래당이 자멸할 지경인데 이 힘이 가만 놔둘 리 만무하다.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 연합뉴스

매번 기대 이상의 나락을 보여주는 바른미래당의 막장극을 그래도 시청하는 것은 유승민(계)의 향배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당 비당권파가 탈당해 제3의 대안신당을 부르짖지만 쪼그라든 ‘호남 기반’에 기생하려는 ‘국민의당 시즌2’는 성공할 수 없다. ‘촛불’과 ‘태극기’ 사이 공간에서 지금 텅텅 비어 있는 곳은 가운데와 태극기 사이 중도우파 땅이다. 바른미래당의 실패도 이 영역을 개척하는 대안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틀린 정당구도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한국당의 극우화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지금은’ 개혁보수의 등대 역할이 더 절실하다.

결국 유승민(계)이 관건이다. 한국당은 아무리 ‘살길’이라고 한들 과거(박근혜)와 절연하고 탄핵을 털고 가지 못할 것이다. 통합을 위해 내밀 수 있는 건 ‘반문연대’의 빈약한 명분과 당선을 담보하는 공천뿐이다. 다름 아닌 유승민을 움직이기에는 턱없다. 굳이 평론을 들이밀 것도 없다. 유승민은 지난 5월 동국대 강연에서 이랬다. “한국당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저히 바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팔고 태극기 붙잡고 갈 것 아니냐. 그런 보수 하려고 4년째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다.” 그 강연에서 이런 다짐도 했다. “정치하는 사람은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가 추구하는 게 있으면 그걸 끝까지 해봐야 한다. …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한국당에 들어가고 다음에는 저쪽이 기웃거리고 나면 국회의원 한두 번 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다. “새로운 보수, 건강한 보수가 진짜 힘든 일이지만 그게 옳은 길이라면 누군가 시도하고 그러면서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유승민은 끝까지 개혁보수의 깃발을 놓지 마라. ‘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교섭단체 대표연설(2015년)을 소환하자. “제가 꿈꾸는 보수는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보수입니다.” 보수정당의 타락을 위장하는 장식으로 쓰이기에는 그가 그리는 보수의 가치가 너무 소중하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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