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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삶은 그 시절 절대 가난의 전형이었다. 그는 1948년 음력 8월26일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봉제 노동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갔던 가족은 1954년 상경, 서울역 근처 염천교 아래서 노숙하며 동냥과 행상으로 연명했다.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갔지만 팍팍한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중퇴한 전태일은 15세 때인 1963년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마저 첫해를 넘기지 못한 채 연말에 자퇴한 뒤 다시 상경,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한다.
12일 대구 남산동 2178-1번지 집에 그의 이름이 아로새겨진 문패가 달렸다. 스물두해의 짧은 생에도 “하루하루의 시간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았다”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한 장소,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가족이 1년 남짓 방 2칸에 살았던 셋집이 있던 곳이다. 지난해 ‘(사)전태일의 친구들’이 모금운동으로 4억3000여만원을 모은 뒤 최근 매입 절차를 마쳤다. 전태일이 몸을 뉘었던 방을 복원하는 등 최대한 원형을 살려 그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전시관으로 꾸며진다. 시민들의 뜻이 담긴 문패가 내걸리는 순간, 하늘에서 지켜본 전태일의 감회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게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사른 지 50년 만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으로 돌아왔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전태일길’이 생겼다. 전태일이 1966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판잣집이 있던 길이다. 이 일대는 1985년 재개발돼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도봉구가 흔적을 찾아 명예도로명을 부여하고 길 안내판 설치를 마쳤다. 청년 전태일이 차비를 털어 배곯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먹인 뒤 한참 동안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이다. ‘따뜻한 오빠’ 전태일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1970년 11월13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불꽃으로 스러졌다. 전태일의 집, 길이 재현되면서 그가 꾸었던 꿈과 삶, 정신 또한 부활하고 있다. 시민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전태일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아직도 각박하고 처절한 노동 현장과 세상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오피니언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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