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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진단이다(<시학> 6장).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는데 그걸 뒤늦게 알고 울부짖다가 제 눈을 찔러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것을 그리스인들은 야외극장에서 보았고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둘 중 하나를 특별히 강하게 느끼는 인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대의 연극론은 인간 유형론으로 전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연민의 인간’과 ‘공포의 인간’이 있다고 말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타인’에게 닥친 비극을 동정하느라 진이 빠지는 연민의 인간과 ‘자기’에게 닥칠 비극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전율하는 공포의 인간은 서로 다른 결심을 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에 의해, 공포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불행”을 통해 느끼게 된다고 한다(<시학> 13장). 연민이 ‘부당함’의 느낌에 관계한다면, 연민이 분노를 동반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공포가 ‘비슷함’의 조건 속에서 발생한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분리 욕망이 자극될 것이고, 그 분리의 경계선이 흐려지는 상황은 강한 혐오를 촉발할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나의 세상으로 넘어오지 마라.’ 노숙인을 보며 두 유형의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은 이렇다. ‘이것은 부당하다. 사람이 저렇게 방치되어선 안 된다.’ ‘잘 보거라. 너는 저런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 

둘 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지만, 후자가 더 흥미롭다. 인류학자 김현경에 따르면 노예를 부리는 데 열심이었던 미국 남부에서 오히려 자유와 평등의 사상가들이 강세였던 것은 전혀 아이러니가 아니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람 장소 환대>, 2장). 그들은 노예에게는 없고 자신들에게는 있는 자유의 소중함을 생각했고, 노예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평등한 무리에 속한 것에 감사했다. 한편 1790년에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사회라는 ‘복종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염려하며 이렇게 한탄했다. “병사가 장교에게 대들고, 하인이 주인에게 대들고,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대들고….” 

한국의 현대사에서 부와 권력을 누려온 지배 세력 중 상당수가 이 공포의 인간에 속할 것이다. 그들의 주문(呪文)과도 같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념이라기보다는 공포라는 기저 감정의 이념적 분장(扮裝)에 불과해 보인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고, ‘시장경제’의 핵심은 시장이지 경제(경세제민)가 아니다. 공포의 인간이 정치에 기대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경세제민이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약속하는 ‘자유-시장’이며 비천한 이들로부터의 보호다. 그것만 제공된다면, 숱한 민주투사를 사법살인하고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마저 학살하려다 처단된 박정희도 존경할 수 있다(그에게 공과가 있다는 말은 끔찍하다. 타인을 희생시켜 내 굶주림을 면한 것에 유감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이런 삶은 공포라는 자연스러운 인간 감정에 순응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그 삶의 전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존경할 만한 무엇이 없다. 그래서 공포의 인간은 연민의 인간에게 은밀한 열등감을 느낀다(과거 운동권을 사냥한 공안검사의 병리적 열정은 극적이지만 전형적인 사례다). 공포의 인간은 연민의 인간에게 진짜 얼굴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가면인 줄 알고 벗기려 했는데 가면이 아니라 피부라면, 그 피부라도 벗겨내서 피 흐르는 피부를 가면이라고 우겼다. 역사는 그것을 공작(工作)이라 부른다. 유구한 역사를 갖는 ‘간첩 만들기’보다 근래 더 중요해진 공작은 비위를 털어 도덕성 훼손을 시도하는 ‘위선자 만들기’다. 가끔 일부 검사와 일부 기자가 그 일을 하청받는다. 

이 공포의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이념이라는 것이 있다고, 심지어 그 이념이 바로 보수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은 사려 깊은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에게 깊은 수치심을 안길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파울 파르하에허는 신자유주의를 일러 ‘우리의 가장 나쁜 측면을 장려하는 시스템’이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보수주의란 ‘우리의 가장 일차원적인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이념’이다. 그래서 진정한 보수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한국의 보수가 되는 것은 쉽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것처럼 내 안의 자연(욕망)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는 일, 세상에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쉬운 일을, 한국의 보수는 해낸다.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듯이, 마치 대단한 일을 한다는 듯이, 전혀 들키지 않았다는 듯이.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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