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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능선은 완만하고 두툼한 산길이었다. 배가 불룩한 황소의 등에라도 올라탄 듯 능청능청 기분 좋은 산행이 이어졌다. 이 높은 지대에 웬 물일까.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물기가 촉촉한 곳이면 어김없이 멧돼지의 소행인 듯 흙이 마구 파헤쳐졌다. 단단했던 땅이 깊은 상처를 입고 흙으로 변해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검게 번들거리는 흙을 가볍게 한 줌 쥐어 보고 지나쳤는데 꽃동무가 어깨를 툭 치더니 말라가는 풀솜대를 건네주는 게 아닌가. 멧돼지한테 받혀서 뿌리째 뽑힌 것이니 가져가서 한번 키워보시죠!

멧돼지는 무슨 말을 꺼내 놓으려 해도 나오는 건 고함과 신음뿐이다. 그 외마디 신호로 새끼를 키우고 식구들을 인솔하며 살림을 꾸려나간다. 어찌 할 수 없는 멧돼지가 마구 들쑤신 분노의 흔적을 보다가 얼른 목을 축이고 한 모금의 물을 남겨 생수병에 풀솜대를 넣었다. 이 풀이나 내가 마시는 음료수가 같다는 게 참으로 새삼스럽다. 사실 우리는 같은 원소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 다시 심어주는 게 도리이겠으나 조금 욕심을 내어 풀솜대를 사무실의 빈 화분에 옮겨 심었다. 별 놀라는 기색도 없이 풀은 늘어진 몸을 일으키며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난리통에 중간이 꺾인 줄기를 철사로 묶고 부축해 주었더니 씩씩하게 잘 자랄 태세를 갖추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인다. 아무튼 멧돼지의 발톱을 용케 피해 내 곁으로 오게 된 오대산의 풀솜대. 아주 흔한 야생화이긴 해도 나에겐 아주 특별한 식물이 되고 말았다.

풀솜대가 훗날 다리를 뻗다가 화분의 바닥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도 있겠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멧돼지의 씩씩거리는 주둥이에 놀란 것 이상으로 더 이상 뻗어갈 수 없는 제 캄캄한 앞날에 좌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헤아려 보면 나 또한 콘크리트 화분 속이니 그와 별반 다르지 않는 사정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해 볼까.

올해의 꽃은 이미 다녀갔고 이제 빨간 열매를 야무지게 달고 가을을 물고 오겠지. 올해 더위가 아무리 날뛸지라도 이 기이한 인연의 풀솜대와 함께라면!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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