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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와 땀이 범벅된 날들.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마다 만원이다. 시험 준비생이 아닌 사람은 앉아 있기 미안하다. 여름 두 달을 쉬면 인생이 부도날까. 다들 안쓰럽다. 중·고생을 ‘1318’로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서른 살 넘어 취업 때까지, 아니 평생 학습으로 고달픈 시대가 됐다.
“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 10대를 옥죄는 최고의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에는 나를 비롯, ‘저렇게’ 된 사람들 천지다. 신자유주의 시대 증폭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국가의 역할 부재. 대비하지 않는 미래는 ‘노숙인 신세’일 것이라는 불안이 일상을 압도한다. 더욱 높은 수준의 예견이 필요해졌다. 생명보험의 승리는 이를 상징한다.
서울 대치동 학원가 (경향DB)
사실, 지금 고생이 미래에 보상받는다는 확신도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우리 사회는 미래에 대한 잘못된 개념, 평생 불행하게 사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근대화, 예전에는 ‘새마을운동’, 지금은 ‘창조 경제’(각자 창조하는 경제?). 유비무환.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라! 불안에 떠는 대중을 통제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공포(fear)는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삶은 200년도 안된 근대 자본주의의 시간관에서 비롯됐다. 지금은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17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시간관은 낯설고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농업 중심의 생활방식에서 시간 개념은 24절기처럼 태양의 운행과 계절의 순환에 근거했다.
순환적 시간은 반복되는 하루, 사계 등 자연의 원리를 기초로 만들어진 내부가 닫힌 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과거와 현재밖에 없다. 원은 닫힌 것이므로 미래 개념은 근본적으로 차단된다. 그러나 직선적 시간관에서 시간은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있다. 시간의 최종 목표는 미래다. 시간에 위계가 생긴 것이다.
KBS-1TV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호모아카데미쿠스'의 한장면 (KBS)
오늘날에는 지구상 어디에서나 현재 시각이 몇 시인지 정확히 알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간을 대충 계산했다. 아침, 점심, 저녁… 이 정도였다. 현대인에게 시간 계산은 가장 중요한 자기 관리다. 나이듦에 대한 혐오는 ‘남은 시간이 없다’는 공포 때문이다. 교육이 미래를 위해 도구화된 것은 당연하다. 교육, 아니 정확히는 학력도 아닌 학벌이 계급 재생산, 취업, 행복,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 됐다.
인생이 끝없는 길, 험한 길, 가지 않는 길 등 길에 비유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예전과 달리 과거, 현실, 미래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계속 진행되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다는 비가역성(非可逆性)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을 아무리 외쳐도 그게 잘 되던가.
미래 개념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상록수형 인간이든, 부귀와 출세를 지향하는 인간이든 모두 시간의 선구자들이다. 미래를 미리 실현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의지와 계획, 시도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우리는 경쟁, 노력, 사명감 속에 살게 됐고 인생은 무의미하게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무의미하니까 끊임없이 사는 의미와 이유를 묻는 것이다.
‘하면 된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미래를 일찍 실현하고 선점하면 성공한 인생, 선진국, 첨단의 영광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미래라는 목표를 향한 달리기 시합이 됐다. 여성, 장애인, 가난한 사람은 이 달리기에서 기회와 조건이 모두 불리하다. 그래서 이들이 성공하면 ‘인간극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오지 않는다’는 뜻. 미래를 기다리는 현재가 미래다. 미래는 불가능한 것이다.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어차피 도달은 없다. 당도의 순간이 곧 현재이고, 도달한 이후에는 또 다른 미래가 대기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낙오자’를 대하거나 자포자기할 때, “쟤는(내겐) 미래가 없어”라고 말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이 말은 직선적 시간관 때문에 생긴 말인데, 모순적이게도 직선적 시간관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미래는 희망을 상징한다. 그것이 있다/없다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실제로는 현재가 바로 미래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고 싶다면, “오늘이 없다”가 맞다.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미래가 없기는 가난한 청춘, 비사회적인 사람, 반사회적인 사람, 부자, 스펙 좋은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다. 장밋빛 미래는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게 아니다. 미래 자체가 실체 없는 관념이다. ‘미래 지향적’인 사람의 달리기는 허공에의 질주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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