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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세상”에서 “백성을 구하라”며 행동한 자는 누구인가? 탐관오리에게 가족을 잃은 백정 출신의 도적이다. 그의 의적 무리는 저마다 깊은 상처를 지닌 민초들이다. 330척의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자는 누구인가? 조정이 고문 끝에 버린 장수다. 그의 수군은 공포에 찌든 패잔병들로 간신히 12척의 배에 올라타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개국 초기 조선의 사라진 국새를 찾는 소동 끝에 나라님을 깨우친 자는 누구인가? 신하들이 아니라 산적과 해적이고 이보다는 고래다.

웨스턴 스타일의 <군도>와 정통 사극 <명량> 그리고 코믹 액션 어드벤처 <해적>은 사극 대작에 흥행 돌풍이란 유사점이 있지만 이보다 더 유별난 공통점이 있다.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지키고 국새를 찾는 국가 대사를 수행해야 할 높은 자와 가진 자를 횡포와 무능으로 일관하는 악당으로 설정한다. 이들의 탐욕과 전횡 때문에 극한의 트라우마를 겪으며 바닥에 버려진 민초들이 되레 목숨을 걸고 공공의 임무를 실행한다. 거액 투자와 싹쓸이 배급의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에 투영되거나 반영되는 권력에 대한 대중오락의 감각이 이렇다.

이런 현상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국민을 구하는 긴급한 표지(index)는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한 명의 영웅(icon)이나 찾아야 할 국새 같은 자존의 상징(symbol)은 보이질 않는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뿐더러 결코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자괴의 심리를 가져본 이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이들이 흥행 대열에 섞여 컴컴한 극장에 앉아 기분 전환이나 가상 위로의 두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득 세월호 참사의 끝나지 않은 생중계를 현재진행형으로 공감하는 이들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지 궁금해진다. 다른 건 몰라도 2014년 이곳에 도치(<군도>의 하정우)와 순신(<명량>의 최민식)과 철봉(<해적>의 유해진)이 산다면 그들은 더 이상 국가나 외적과 씨름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권 교체가 내 삶이 당면한 제일의 목표도 아니거니와 국가 대사가 내 생활의 문제에 책임을 지는 절대적 척도가 아님을 거듭 체감해온 하수상한 세월이다.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어쩌면 우리는 배멀미를 하는 해적 철봉일지 모르겠다. 자신이 희망하는 곳과 어울리지 않는 환상의 ‘타이타닉’이나 체념의 ‘설국열차’에 올라탄 승객 처지와 닮았다. 반복되는 절망과 모멸을 자기 최면술로 계속 견디자니 임계점을 넘었지 싶다. 무탈한 아침을 맞이하고 저녁이 있는 일상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고 싶은 열망도 그만큼 커졌다. 그렇다면 여객선과 열차에서 내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내려서 떠나는 길이라면 이곳을 지켜보지 않을 도리 또한 없겠다.

밀양, 삼척, 강정, 온양, 팽목, 안산 그리고 또 어느 곳인가는 결코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오늘 이곳을 있게 하느라 내 몸에 아로새겨진 이름들이라는 것을 알아챈 이들이 느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기를 사용하고 휴대폰을 쓰고 농어촌을 찾고 수학여행을 떠나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말하는 이 지명들로 희망버스를 타고 가진 못할 순 있다. 그럼에도 내 삶을 지탱하는 이 이름들을 부를 줄은 알아야 우리 시대의 희망사용법에 정직하게 입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각생 같은 이런 연상 작용은 최근 잇따라 본 대작 영화들의 뒤끝에서 시작되었다.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는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그 가족처럼 모든 걸 두고라도 튀어갈 수 있는 그 남쪽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 하여 내가 사는 이곳과 알고 지내는 관계가 마을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마을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지키고 옥새를 찾는 해법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 과업을 일찍부터 구상하고 실행했던 위대한 선배들이 여러분 계신다. 국내엔 원주를 협동조합의 도시로 일군 장일순 선생이 있고 해외엔 70만개의 마을로 이뤄진 공화국 인도를 추진한 간디 선생이 있다.

이들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산업화와 민주화로 근대 국가를 운영하느라 비롯된 모순들을 풀 수 있는 방도가 오직 국가의 개조나 정상화에 있느냐고. 아니면 만사가 국가로 수렴되는 비정상을 인간적인 크기로 축소하고 다양한 생김새로 돌려놓을 마을의 상상에 있느냐고. 이 질문은 이념과 여야를 넘어 모두의 삶을 관통하는 화두가 되었다.

마을 민주주의와 마을 미디어의 발상이 소중한 이유도 70만개의 마을이 연대하고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다. 이 담대한 소망은 선배들에게 빚지고 있지만 그 실행은 우리 시대의 도치와 순신과 철봉에게 달려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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