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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꽃산행. 춘향의 묘 근처 지리산 구룡계곡을 탐방하고 남원에서 묵기로 했다. 모텔은 낡았다. 눅진하고 퀴퀴한 냄새들이 컴컴한 계단에 잔뜩 뭉쳐 있었다. 아침에 세수하려는데 녹슨 수도꼭지에서 물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쫄쫄쫄, 부실한 지하자원을 받으려고 두 손바닥에 힘을 주고 쪽 진 바가지처럼 모을 때, 열 손가락 끝이 해안선처럼 제법 발달하였다. 텅 빈 손이 마치 거꾸로 선 세계지도 같다는 상상을 했다. 물이 금방 손가락 절벽 아래로 흘러넘쳤다.

보잘것없는 나의 몸도 나에겐 대륙이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너무 많다. 호두 같은 두개골 너머 저 어딘가에 있을 무의식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 믿고 의지하는 의식에도 낡은 모텔처럼 지하실이나 다락방 같은 구조물이 있다는 것. 지금 그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그 생각의 주인은 과연 나일까. 과연 그가 그곳을 온전히 장악하고 관리하고 있는가. 내 안의 무수한 거기로 연결된 계단을 밟아간다면 또 어떤 너머로 나아갈 것인가. 아, 몸을 양말처럼 홀랑 뒤집을 수 있다면! 좁은 화장실에서 두서없이 생각의 집을 몇 채 지었다 허물었다.

근래 들어 사나운 역병이 창궐하여 어쩔 수 없이 주말에도 집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지구는 참 좁은 동네인가 보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생긴 오미크론이 단 며칠 만에 전 세계로 퍼진다. 그런 조건의 하루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의 앞대목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아프리카 대륙은 고개를 수그린 남자의 두개골 모양과 닮았다. 이 커다란 머리의 사나이는 코알라와 오리너구리와 캥거루의 땅인 오스트레일리아를 근심스러운 듯 내리뜬 눈으로 보고 있다.”

잠시 책을 덮고 지도를 검색해 보았다. 소설가의 말마따나 어떤 남자의 밋밋한 두개골 모양의 아프리카 땅덩어리가 그곳에 있지 않은가. 오, 기발한 상상력의 오에 선생님. 다시 책을 펼치면서 거실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건 밖으로 나가지 못해 심심한 나의 하루. 세계지도의 한 조각이나마 직접 발로 깨물며 디디고 싶은 충동에 사정없이 시달린 한 띵띵한 육체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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