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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과 유승민이 합칠 수도 있다. 그러나 태극기 부대, 자유한국당, 중도 보수층이 반문 연합의 깃발 아래 통합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보수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탄핵 이전의 시간에 머문 구보수와 탄핵의 강을 건넌 신보수는, 진보와 보수처럼 서로 다른 존재다. 강을 건넌 건지 아닌 건지, 도강 중인지 알 수 없는 한국당의 황교안, 바른미래당의 유승민·안철수·손학규는 다 다르다. 보수 통합을 한다 해도 통합에 참여하지 않는 보수세력이 반드시 나온다. 세상이 변했다. 보수의 다원성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연대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도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부끼는 광화문 대규모 집회에 참석해 분노를 터뜨렸다. 대규모 광화문 집회는 더 이상 없지만, 중도층은 그 집회를 통해 이미 살짝 선을 넘었다. 이들은 총선 앞두고 돌아올까?

여권은 기존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성찰하지도 않고, 민심에 역행한 책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포용·협치를 언급했지만, 14일에는 정치갈등의 책임을 야당에 돌렸다. 한국당이 정신 차리고 혁신했다면, 여권이 이렇게 태평할 수 없다. 하지만 상승기류를 탔다고 믿는 한국당은 이대로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당에 혁신의 내적 동력이 없을 때 외부 자극이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대로 가겠다는 여권은 결코 한국당에 자극제가 되지 않는다. 여권과 한국당은 서로에게 긴장감을 주지 않는, 안심할 수 있는 파트너이자 편안한 존재다. 사실 양측의 적대적 공존과 현상유지 전략은 상대가 변심하지 않을 것을 굳게 믿는 ‘신뢰동맹’으로 유지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다. 한국당을 너무 믿으면 안된다. 한국당이 대안은 못 되더라도 내년 총선에서 사고 칠 수는 있다. 이런 경우다.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던 시민들이 분명한 실책을 바로잡지 않는 집권세력에 따끔한 경고를 주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당을 찍을 것인가’가 아니라, ‘민주당을 찍지 않는 것’이다. 한국당은 잠시 빌려 쓰는 도구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던 처지에서 한국당, 제3보수당을 찍을 때의 찜찜함, 혹은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다. 그렇게 그날 아무도 모르는 반란이, ‘조용한 복수의 밤’이 펼쳐질 수 있다.

근거 없는 상상일까? 20대 총선에서 우리가 목격한 게 바로 조용한 복수극이다. 2016년 야당은 민주당과 국민의 당으로 분열하고, 지지율은 여당인 새누리당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박근혜에게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한 시민은 그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정국을 여소야대로 뒤집어놓았다. 그렇게 패배하고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눈 깜짝 안 한 박근혜를 시민이 어떻게 했는지는 생략한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쯤 국정 전반을 뜯어고치고 있어야 한다.

10년 전 박근형 연출의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의 남편은 돈 한 푼 벌지 못하면서 밖으로만 나돌 뿐 집안일에 관심이 없다. 세상이 무서워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시동생은 변비로 고생한다. 생계를 위해 노래방 도우미를 하는 주인공은 매일 밤 술에 취한 채 귀가한다. 친구 부음을 듣고 문상 갔던 시아버지는 집 나갔던 아내가 상주 노릇을 하는 걸 보고 집 화장실에서 목을 맨다. 환풍기 없는 화장실에서 시체가 썩어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관객은 눈앞에 펼쳐지는 기이한 가족 이야기에 놀라지만, 무대의 주인공들은 그게 일상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다. 관객과 배우 간 거리감·어긋남이 인상적이었던 이 연극을 10년 만에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극장이 아닌, 한국정치 무대에서다. 이 무대에서도 주연·조연, 여야 가릴 것 없이 충격적인 일을 벌여 시민을 놀라게 해놓고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낸다. 연극이 그런 것처럼 정치 무대에도 제 본분을 다하는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다. 자기들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 가족들처럼 여권도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주워 담을 생각을 않는다. 그러니 6개월 뒤 무슨 일이 생겨도 너무 놀라지 말기 바란다. 10년 전 본 연극 제목이 <너무 놀라지 마라>다.

민주당은 6개월 뒤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만 한다.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권력을 다루는 자신의 능숙한 기교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사형수도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사면될 거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은 말했다.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은 갖고 있다. 한 방 맞기 전까지는.”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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