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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2002년부터 음력 9월9일인 중양절을 시작으로 99일 동안 글을 읽고 일기를 쓴다. 올해는 10월7일부터 시작했으니 오늘이면 절반이 조금 넘은 58일째가 된다. 결국 책을 읽는 일이지만 굳이 글을 읽는다고 한 까닭은 해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정해 놓고 그 주제에 맞는 글을 찾아 읽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대여섯 해가 지날 무렵부터 주제를 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 권의 책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을뿐더러 책 한 권을 다 읽는 경우도 지금까지 없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여서 그해에 정해 놓은 주제에 맞는 글을 찾아 읽어야 하므로 알맞은 글을 찾는 일이 글을 읽는 일보다 더 어렵기도 하다. 

글은 대부분 고려나 조선의 사대부나 승려들이 남긴 문집에 실린 것들이다. 당연히 한자와 씨름을 해야 하는데 한자만 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나 산문 중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문장들이 많은 터여서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시경>이나 노장 그리고 불교경전 정도는 기본으로 꿰뚫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준비가 너무 없었다. <맹자>까지 공부한 알량한 한자 실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처음에는 해가 거듭될수록 공부할 거리만 잔뜩 쌓여갔다. 가을에 글을 읽기 위하여 겨울부터 여름까지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좌충우돌, 엄벙덤벙 허우적거린 세월이 올해까지 18년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어찌나 아는 것이 없는지 해마다 99일이라는 시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글 속, 한 글자에 막혀 서너 시간을 끙끙거리기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버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지나고 나면 만족감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는 다음에 읽을거리를 미리 준비해놓고 중양절을 기다리기도 했는데, 병치레를 했던 해는 쉬었지만 이듬해에는 퇴계 이황을 시작으로 그 제자들의 문집에서 집과 꽃을 가꾸는 이야기를 찾아 읽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부족하나마 흥미로운 글을 제법 찾아 읽었는데 그때는 서너 달 전부터 미리 자료를 찾느라 수많은 문집을 뒤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자료를 찾는 동안 읽는 글은 주제와 어긋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어긋난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분류를 하여 따로 갈무리를 해 두었다. 몇 해 뒤 그것들 중 가장 불룩해진 주머니를 헐어보면 또 하나의 훌륭한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글 읽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지금은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내 머릿속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글 주머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 많은 글 주머니 중에서 은둔에 관한 주머니를 풀어서 읽고 있다. 은둔의 사전적 정의는 ‘세상의 일을 피하여 숨음’이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닫고 돌아앉아 있는 것이나 같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일 뿐 단절과 폐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은둔이라고 하면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골짜기에 숨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은둔하는 사람을 큰 은자와 작은 은자로 나누기도 하는데 작은 은자는 깊은 산속 골짜기에 숨고 큰 은자는 저잣거리에 숨는다. 그러니 작은 은자는 앞에 말한 것처럼 단절을 꾀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큰 은자는 저잣거리에서 세상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면서 자신을 드러내지도, 감추지도 않고 올곧게 스스로를 지키며 때를 기다리는 인물이다. 은둔이란 뒤돌아 앉아 문을 닫아걸고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세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요즈음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개 은둔을 하게 되면 말을 그치게 되고 세상 속에서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 속에서 잊히는 것을 못 견딘다. 그러나 공자가 <논어> ‘학이’ 편에서 말하기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인편’에서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자가 되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 ‘위령공’ 18장에 보면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고, ‘헌문’ 32장에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노자는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그만큼 더 내가 귀하다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익숙한 사람들이 읽으면 어이없어 할 소리일 수도 있겠다. 

올해 하필 많은 글 주머니 중에서 은둔이라는 글 주머니를 풀어 읽는 까닭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시끌벅적해서이다. 올 한 해 특히 너도나도 개인방송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애를 쓰고 정치판에서는 서로를 향해 악다구니와 같은 독한 소리를 내뱉었다가 아니면 말고 식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편가름을 강요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글이 있다. “사람에게 빠지느니 차라리 못에 빠져야 한다. 못에 빠지면 그래도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수 없다.” 주나라 무왕이 나라를 세운 후 자신이 사용하는 세숫대야에 새기고 얼굴을 씻을 때마다 되새겨 경계로 삼았다는 글이다. 이 글에서처럼 빠져들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정치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사람을 흩어지게 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여하튼 내 처지가 공부방에서 날마다 은둔에 관한 글을 읽고 쓰면서 스스로 은둔하고 있는 것이나 다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다. 해가 바뀌면 곧 글 읽기가 끝이 날 테고 99일 동안의 한정적인 은둔도 함께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읽은 글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논어>에서 말하는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는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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