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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른 새벽부터 공부방에 앉았는데 창밖 어둠이 칠흑 같다. 또 때가 된 것인가. 괜히 마음이 급하다. 뭔가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부방에는 불도 켜지 않았다. 들릴 듯 말 듯 방에 가득 찬 피아노 소리를 두 귀에 걸고 멍하게 어둠을 바라보고 있은 지 두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어찌 일 년 동안의 많은 일들이 두어 시간 만에 정리가 되겠는가. 철이 들고 난 후 해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해도 해도 꺼림칙하다. 그처럼 개운하지 못한 까닭은 일 년 365일 동안 겨우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를 가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 자신이 참으로 멍청하고 바보같다고 해마다 되뇌지만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사실 오늘이 2019년의 마지막 날이어서 마음이 더 급했을 뿐 성탄절 후부터 새벽 4시경이면 공부방에 들어가 동살이 비칠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10여년 전부터 일체의 송년모임을 하지 않아서 가능하다. 처음 몇 해 동안 불러도 꿈쩍하지 않자 서너 해가 지나면서부터 더 이상 나오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잊힌 것이며 자발적 소외이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도 나고 불안하기도 했겠지만 이제 그저 덤덤하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겠지만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관계에 휘둘려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것보다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한 채 나로 사는 것이 한결 홀가분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했을까. 카메라 가방도 그렇다. 애물단지인 그 가방 속에 뭘 그리 많이 넣어 다니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다. 장비를 적게 가지고 다니면 마치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처럼 가방을 배불뚝이로 들고 다녔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말할 수 없이 가벼워졌다. 외국으로 촬영을 갈 때도 멍텅구리 카메라 하나만 들고 다니니까 아예 카메라 가방이 따로 없다. 더구나 렌즈를 교환하지 못하는 카메라여도 내가 촬영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없다. 가방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고 몸이 가벼워진 만큼 생각은 왕성해진다. 나는 사진이란 카메라가 찍는 것이 아닌 생각이 찍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오히려 장비에 치일 때보다 사진이 더 나를 닮아서 그 또한 좋다. 

이처럼 올해 들어 바뀐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온 집 안을 점령하고 있던 책을 3분의 1로 줄인 것을 시작으로 바뀐 것들을 살펴보면 대개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것들보다 안으로 집중하는 것들이었다. 또 나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은 것들을 먼지 털 듯이 털어서 가볍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안으로 집중한다고 해서 삶에 대한 자세가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올해에만 새로운 작업을 두 가지나 시작했는데 둘 모두 외국에서 이뤄지는 것들이며 밥벌이를 하는 틈틈이 짬을 내어 촬영을 다닌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삶의 형태를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동력과 경제력을 한 곳으로 모아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또한 내가 나로부터 받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여하튼 한 해의 끝이 되면 시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중국 쓰촨성 일대 촉 지방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면 궤별, 별세 그리고 수세(守歲)를 통해 한 해를 마무리했다. 궤별은 서로 나누는 송년인사, 별세는 사람들마다 자기 형편에 맞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 가지는 송년모임이다. 마지막으로 수세는 가까운 벗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한 해 동안의 일을 시끌벅적 이야기하며 밤을 새는 것을 말하므로 각각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거의 같다. 

소동파는 ‘별세’라는 시에서 사람은 떠나도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해(歲)는 한 번 가면 다시 볼 수 없다며 세월에게 “너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의 같은 제목 또 다른 시에서는 막 익어가는 동쪽 집의 술과 서쪽 집의 살찐 돼지로 하루를 즐기며 세밑의 슬픔을 달래보자고 한다. 또 ‘수세’라는 시도 지었는데 거기에서는 흐르는 세월이 마치 구멍으로 들어가는 뱀의 속도처럼 순식간이라고 했으며, 오늘과 같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구멍으로 들어간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옴짝달싹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그것은 한 번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이미 흘러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한 표현이다. 

음력이긴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인 섣달그믐날에 하는 갖가지 흥미로운 풍속들이 많은데 언젠가 읽은 중국 오 지방의 풍속이 기억속에 남아 있다. 남송의 정치가인 석호(石湖) 범성대가 지은 ‘매치애사(賣癡 詞)’, 곧 ‘바보멍청이를 파는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섣달그믐날 밤, 어른들이 잠을 자지 않고 가는 해를 아쉬워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고 있을 때 골목이 시끌벅적하다. 그 날은 아이들도 잠을 자지 않았는데 모두 길거리로 나와 무엇인가를 사라며 외치고 다닌다. 앞에 말한 ‘매치애사’에서 ‘치’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뜻하고 ‘애’도 어리석음을 뜻한다. 이 둘을 합치면 대략 ‘바보멍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팔러 다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둔함과 미련함을 누군가에게 팔아버려야 좀 더 똑똑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문사 계곡(谿谷) 장유는 ‘바보를 파는 아이’라는 시에서 말하기를 내가 그 바보를 사줄 테니 대신 자신의 교활한 꾀를 가져가라고 한다. 살아보니 자신에게 남은 것은 갖은 책략을 만들어 내는 지혜라는 이름의 꾀만 남았다는 것이다. 책략은 결국 근심을 만들어 내지 않던가. 그러니 꾀나 지혜보다는 바보가 더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나 또한 오늘 밤이나 음력 섣달그믐에 골목어귀를 서성거려 봐야겠다. 혹시 바보를 팔러 나오는 아이들을 만나면 얼른 사서 나에게 덧입힌 채 다가오는 한 해를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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