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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어(京語)는 한양의 본래 음이지만, 반드시 도읍이라고 해서 바른 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옛날 신라는 영남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고, 백제는 호남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으며, 고구려는 관서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고, 단군은 해서 지방 음을 경음으로 삼았다. (…) 지금 경음을 가지고 향음(鄕音)을 놀리고 비웃기 때문에 한양에 다니러 간 시골 사람들은 기필코 경음을 본받으려고 하니 모두 고루한 짓이다. 어떤 사람은 ‘요즘은 산골이나 바닷가 촌마을이라도 모두 한양 옷을 입고 한양 말을 쓸 수 있으니, 비루하고 속된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나는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바탕이 있은 뒤에 문채를 내고 멀리까지 지속될 수 있다. 요즘 풍속에 유행하는 한양 말과 한양 옷은 백성들의 마음이 불안하여 모두 겉으로 번다하게 꾸미기에 바빠 그 바탕이 전부 손상된 결과이니, 온 세상 애나 어른이나 충후(忠厚)하고 신실(信實)한 사람이 없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절대 붙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퇴옹 이황이 영남의 발음을 고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옛 의미가 있다.”
인용문이 길지만 위 글은 조선후기 실학자 중 한 명인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가 쓴 ‘사물(事物)’에서 따온 내용이다. 사투리를 옹호하는 위백규의 논리 전개도 재미있는데 마지막 줄은 더욱 흥미롭다. 위백규에 따르면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은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그가 태어나 살아온 경북 안동 지방의 말씨를 고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위백규보다 226년 전에 태어난 이황의 말씨를 그가 알 정도라면 퇴계의 말투가 사대부들 사이에 꾸준히 칭찬을 받으며 회자되었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비판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처럼 중앙관직에 올라서도 향음이라고 하는 지방 말을 고수한 사대부들의 이야기가 더러 전하는데 퇴계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인 오졸재(汚拙齋) 박한주(1459~1504)도 그중 한 명이다. 간송(澗松) 조임도(1585~1664)가 쓴 ‘오졸자 박 선생 여표비명 병서’에 따르면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박한주는 1483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1491년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그가 경연에 들면 임금인 성종이 말하기를 “사투리 쓰는 정언이 왔구려(辭吐俚正言至矣)”라고 했다는 것이다.
위 글처럼 무려 500여년 전 사람들도 표준어와 사투리의 사용을 두고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더해 필자가 고약하게도 서울 중심의 말보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글만 예로 들었다. 굳이 그렇게 한 까닭은 필자의 서러운 경험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이 아니다. 분지여서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도 억센 억양으로 소문난 대구에서 태어나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왔다. 그러니 서울에서 산 시간이 태어난 곳에서 산 시간의 5배가 넘는다. 그 시간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많이 순화된 서울 말을 흉내 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구 말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곧 내가 쓰는 말은 서울 말도 아닌 것이 대구 말도 아닌 어중 뜬 말이다.
말투가 그렇게 된 까닭은 중학교의 국어 시간이나 영어 시간 때문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전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 전학 오자마자 들어간 반의 전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당연히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국어와 영어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누가 읽을까”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내 이름을 외쳤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읽기 시작하면 대구 특유의 억양과 발음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드디어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지만 나의 거친 억양과 발음은 놀림감이 되어 아이들이 등 뒤로 따라다니며 흉내 내곤 했다.
더구나 그 시절엔 영어와 국어 수업이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소심한 것은 물론 예민한 사춘기였던 그때 친구들의 모든 놀림을 감수하고 내가 나서 자라며 배운 대구 말을 지킬 배포가 나에게는 없었다. 위백규가 말한 퇴계처럼 스스로의 말을 지키기보다 매일 이어지던 국어와 영어 시간의 책읽기를 모면하고 놀림을 벗어나는 것이 어린 나의 목표가 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배운 서울 말이 지금 내가 사용하는 어정쩡한 억양이 돋보이는 말이다.
한낱 사소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그 시절에 난 참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당시 선생님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말리지는 못할망정 아이들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줄곧 사용하고 있었던 대구 말이 나쁘지 않다고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지금은 덜하겠지만 당시 서울과 대구의 격차는 모든 면에서 상상 이상이었다. 드디어 서울에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던 까까머리는 점점 주눅이 들어 서둘러 나의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익혔던 것이다.
글머리의 인용문에서 위백규가 말한 것처럼 말투에는 한 사람의 인생 중 가장 근원적인 모습이 배어 있다. 그 위에 갖가지 다른 모습이 더해지고 삭제되면서 끊임없이 추스르고 또 확장하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이 작은 나라에서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각 지방의 다양한 음식은 그토록 탐하면서 말과 음식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은 왜 생각지 않는 것일까. 강과 산에 의해 서로 다른 마을과 음식이 만들어지듯이 말 또한 마찬가지다. 안 그래도 작은 나라인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서울 중심의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는가. 오히려 서로 같지 않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드물지 않겠는가.
<이지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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