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기막힌 산문에서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을 읽고 감동받으면서도 그런 통념을 다시 생각했다. 다른 글에서 읽었더라면 감동은커녕 의심스럽지 않냐고 또 물었겠지만 이 산문은 몇 페이지 앞에서 대뜸 이렇게 전제했으니까. “자기야, 자기는 자기에게 엿을 먹여야 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만 살려고 해. 인간 주제에.”(김현, ‘리듬’, 계간 ‘문학동네’ 2022년 봄호) 미려하고 자유롭게 술술 흘러가듯 쓰인 것 같지만 실은 인간 주제에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산문. 예컨대 이런 구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곳곳에 박혀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 아니까. 너나 나나 썩고 있지.” “근데 요즘은 있는 애들이 구걸도 잘하더라. 없는 애들은 구걸이 몸에 배서 그게 구걸인지 아닌지 분간을 잘 못하거든.”
인생이 너와 나를 얼마나 썩게 하는지, 산다는 게 구걸인지 아닌지도 분간 못하게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구절을, 나는 전에도 임유영의 시 ‘부드러운 마음’(‘문장웹진’, 2021년 1월호)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마른 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온몸 젖도록 뛰어가지만 이미 구덩이에 죽어 늘어져 있는 개를 본 한 동자가 엉엉 울다 말한다. “아이고 개야, 개야, 너 전생에 사람이었는데 외로이 죽고 개로 태어났다가 또 혼자 죽으니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 태어나지 말라 수차례 외쳐 일렀다.” 그리고 시는 의외의 장면으로 시선을 옮겨 끝맺는다. “동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러고보면 지하철 바닥을 기면서 시위하다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높은 시선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장애가 대수냐고 삿대질하고 내뱉는 욕설을 들으면서, 정치인과 토론하는 자리에서 가슴 높이의 책상 앞에 어렵게 자료를 넘기는 휠체어 탄 대표를 보면서, 그 앞에서 자꾸 웃는 사회자와 정치인의 얼굴을 보면서, 4월16일이 돌아올 때마다 누적된 모욕으로 상해버린 얼굴들과 그걸 조롱하는 말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이든 개든 여기 태어나지 말라고 울며 간곡히 당부하는 동자의 말이 왜 나왔는지 모를 수가 없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 따위가 감히 아름답게만 살 수 없다는 걸 아는 한에서, 왜 우냐고 물을 필요도 없을 만큼 너도나도 썩는 중인걸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서로 쳐다보고 있는 한에서, 외로이 죽은 개에게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간청을 엉엉 울며 하게 되는 한에서, 그 말을 듣고 웃는 사람들도 여기 그렇게 태어날 만한 곳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는 엿먹는 한에서, ‘인생은 아름답다’는 문장에 나는 감동받는다. 그리고 믿는다. 혹은 속는다. 인생이 아름답다고? 어딜 감히, 인간 주제에. 그러나 동시에, 인간 주제라서요.
인아영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