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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인생+]자기 해방의 서사

opinionX 2022. 6. 16. 09:54
 

어느 노인복지관의 실무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시설 이용자 가운데 유난히 심성이 거칠어서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직원들에게도 종종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어르신이 계셨다. 여럿이 나서서 만류하거나 달래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분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란을 피우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고, 정도도 많이 약해졌다.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어르신은 얼마 전부터 복지관의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즐거움에 몰입하면서 언행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폭력은 고통을 다루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그 폭력을 자신에게 가하기도 하죠.” 파커 파머의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을 어떻게 다루면 폭력으로 치닫지 않을까. 한 가지 효과적인 해법은 경험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림이나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고 글쓰기도 좋은 방법이다. 가장 간단한 것은 그냥 말로 풀어내는 것이다. 하다못해 술을 마시면서 괴로움을 털어놓기만 해도 난폭한 기운이 많이 누그러진다. 하지만 술은 촉매제일 뿐이고, 그것에만 의존하면 중독으로 흐를 수 있다.

응어리를 건강하게 풀어내기 위한 핵심 요건은 말 상대다. 가슴을 열고 경청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맞장구도 쳐주고 추임새도 넣으면서 화자(話者)에게 힘을 실어주면 자연스럽게 해소와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울분의 배설에 그치지 않고 감정의 승화로 나아갈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상황을 객관화하면서 자기를 성찰하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스토리텔링의 장(場)이 마련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다양하게 빚어지는 삶의 서사는 마음의 힘을 키워주는 자양분이 된다.

얼마 전에 종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타인이나 조직의 과도한 간섭을 싫어하고 세상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직장인 세 명이 ‘해방 클럽’이라는 사내 동호회를 결성한다. 그들은 각자 걸어온 생애의 여정을 돌아보고 지금의 일상을 둘러보면서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틈틈이 기록한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모여 앉아 그 일지를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늘 버거워해온 멤버들은 그 클럽에서 언어를 회복하면서 해방의 실마리를 찾아간다.

그 모임에서 대화를 할 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는데, 조언과 위로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정서적인 경계를 존중하면서, 저마다 난관을 뚫고 나가는 모습을 지지하고 새로운 자아의 탄생을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 그를 위해서, 각자 내면의 목소리에 온전하게 귀 기울이고 그것을 안전하게 꺼내놓을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낸다.

언어가 억압의 도구로 작용하기 쉬운 세상이다. 지위나 나이 등의 위치 에너지에 편승하여 비난과 폭언을 내뱉는 경우도 흔하다.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아집과 독단의 감옥에 갇혀버린다. 탈출은 가능한가. 서로의 맥락을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확장하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 구태의연한 허위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추앙’하는 관계, 투명한 문법의 서사를 통해 우리는 보다 의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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