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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가 타는 소리는 자작자작. 눈밭에 선 자작나무가 보고 싶은 겨울이야. 올해는 말이 늦터진 아이처럼 눈다운 눈이 안 내리니 속이 다 답답해라. 자작나무를 바라보면서 뜨거운 술을 자작하고 싶구나. 

혼밥 혼술을 하는 것도 자작이라 한다. 만화가이자 수필가인 쇼지 사다오는 혼밥 혼술의 대가. 그의 ‘자작 감행’이라는 수필 한편을 읽었다. “자작할 때는 병맥주보다 도쿠리(목이 잘록한 술병) 쪽이 좋다. 도쿠리를 집어 든다. 적당량을 술잔에 따르고 원래 있던 곳에 도쿠리를 내려놓는다. 엄지와 검지로 술잔을 쥔다.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술잔을 입 쪽으로 가져간다. 그와 동시에 입술도 술잔을 마중 나간다. 쭉 들이켠다. 일련의 이 느긋한 동작들이 좋다. 약간 적적한 부분이 좋다. 고독이 느껴지는 부분이 좋다. 어딘가 내버려진 느낌이 좋다. 이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서 혼자 마신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단, 자작으로 마실 때는 침울해지지 않도록 유의한다).”

연말이라 사람들 틈에서 어지럽게 살았다. 군중 속에서 때론 괴로웠다. 누구도 관심 없는 제 지난한 사업 이야기를 떠든다. 정치 토크는 점쟁이들도 홰를 치는데 밤새 끝이 없다.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보다는 나으니 참아보다가 자작으로 혼술 아닌 혼술을 하게 된다. 게다가 내 에코 천 가방에는 월트 휘트먼의 글 쪼가리가 오랜 날 들어 있다. “해변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아이는, 모든 것 곧 집어삼킬 듯 승리에 우쭐대며 낮게 드리운 묘지 같은 구름, 그 구름들 바라보며, 조용히 운다. 울지 마라, 얘야. 울지 마라, 내 사랑… 나는 별들이 환히 빛나는 모습 바라보며,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온 우주와 미래의 비밀을 풀 열쇠에 대해 생각한다.” 도쿄의 술집을 전전하는 애주가 쇼지 사다오, 필라델피아 항구 어디 밤의 해변을 혼자 거니는 휘트먼을 생각한다. 자작나무가 타는 모스크바의 밤 도스토옙스키는 또 어디서 혼자 보드카를 들이켰을까. 그들의 외로운 두 눈이 ‘자작자작’ 별빛처럼 타오른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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