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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부 누리꾼들이 걸그룹 멤버 수지(배수지)의 화보집 속 사진 몇 장에서 매춘과 로리타 콘셉트가 보인다고 지적했다. 늘 그렇듯 당사자의 입장은 알 길 없고 소속사에서 법적 대응을 한다는 둥 으름장이다. ‘뭘 새삼스럽게…’ 하고 관심을 거두다가, 문득 그 화보집의 제목에 눈이 갔다. <하루라도 젊을 때>. 그러고 보니 ‘하루라도 젊을 때’(‘한 살’도 아니고 ‘하루’다)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실용주의적 처세의 논리가 일상의 정치를 장악한 결과일 것이다. 어쨌거나 자존심 따위는 내버린 듯한 그 화보집의 제목은 문제가 된 화보 이미지들과는 별개로 보는 이에게 민망함을 안겨주었다.

2002년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로 급격히 변모하고 있었다. 신용카드를 내밀며 부자 되라고 덕담을 건네는 부조리도 문제였거니와, ‘빈락(貧樂)’을 논하던 전통적 삶의 품위와 자존심이 상실되는 징후로 보였기 때문이다. 1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부자 되세요’ 정도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부자로 살기 위해 ‘노오력’하면서 자존심 따위는 접어두는 것이 오늘날 ‘헬조선’의 풍경이다.

가수 겸 배우 수지가 출연한 화보

총체적으로 자존심을 잃어버린 한국 사회의 반영일까? 최근 들어 ‘자존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자존감을 다루는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높은 자존감’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가 유행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식당에서 난동을 부리는 꼬마를 주변 손님이 타이르면 오히려 그 손님에게 “아이 기죽이지 말라”고 득달같이 따지던 부모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높은 자존감을 가지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일에 무능한 이들이 자기에 대한 존중에 유능할 리 없다. “아이 기죽이지 말라”며 생떼를 부리던 부모들은 정작 ‘기죽어 살았던’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군사독재 시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던 교육 현장의 무자비한 폭력들. 힘센 자들의 폭력에 길들여져 자존감이 결핍된 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자존감이란 겨우 그 비합리적 권력자를 모델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뻔뻔스러워지는 것,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높은 자존감은 사실상 자존감의 결핍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자존감에 전제되는 도덕 감정이 여기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도 그렇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 발표한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는 뜻의 ‘자괴감’이라는 단어조차 ‘후회’나 ‘억울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썼다.

박 대통령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까? 어린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자라 왔으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폭력적 권력 남용을 자존감의 모델로 삼고 있었다. 그렇게 왜곡 형성된 자의식으로부터 성찰과 부끄러움을 아는 진정한 자존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충격적인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난 지 3개월이 되도록 스스로 책임지고 나서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괴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눈을 돌려보면, 어떤 부당한 지시에도 순응하는 공무원들, 소속사에 대한 순종과 복종을 당연시하는 아이돌 멤버들이 이 시대 젊은이와 청소년들에게 성공의 표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섬뜩하기까지 한 일이다. 한국인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존감을 지키는 삶이란 어떤 방식의 개인적 삶을 택하는가에 달려 있기보다는 이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저 촛불의 광장에 기대를 품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장에 봄이 찾아올 무렵 한국인의 잃어버린 자존감도 다시 꽃필 수 있으리라는.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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