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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란 단어는 종종 ‘대중주의’라고 번역되는데, 그래서인지 그 실체가 잘못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령 아니냐는 착각이다. 2018년 이재명 경기지사는 한 인터뷰에서 본인은 포퓰리스트라고 대놓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포퓰리즘의 반대말은 엘리트주의이고, 촛불혁명이 보여주었듯이 국민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며, 따라서 본인은 주체를 대변하는 포퓰리스트라고 설명했다. 틀렸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라 선한 대다수 국민과 나쁜 소수 엘리트(혹은 기득권)를 구분해서 정치에 이용하는 모든 방식을 말한다.
포퓰리즘의 원래 뜻에 대입해보면 문재인 정부는 포퓰리즘에 대한 취약성을 안고 출발했다. 2016년 촛불집회에서 2017년 대선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담론을 빅데이터 분석해보면 24주에 걸친 촛불집회를 통해 ‘문재인과 국민’ 대 ‘박근혜와 적폐세력’ 간의 대결 양상이 만들어지고 ‘적폐청산’이라는 소임도 만들어진다. 그 이후로 모두가 알다시피 ‘시민’은 ‘촛불시민’이 되었고, ‘촛불집회’는 ‘촛불혁명’이 되었으며, 대통령은 스스로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대통령’(2017년 9월19일 세계시민상 수상 소감)을 자임했다.
한쪽에 촛불혁명으로 태어나 촛불시민과 함께하는 문 대통령이 있다면 그 대척점에는 적폐세력이 있다. 이들은 좁게는 박근혜와 친박세력, 넓게는 보수정당과 보수언론과 대기업과 문화권력 그리고 검찰과 같이 개혁에 저항하는 관료 등의 부패한 기득권이고, 역사적으로 짧게는 친미반공 군사독재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길게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한 다수와 그들의 지도자, 악한 기득권의 끈질긴 저항, 그 저항을 뿌리 뽑기 위해 지도자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국민의 뜻’에 이르기까지 문재인 정부는 포퓰리즘을 구성하는 3대 요소를 고루 갖춘 환경에서 태어났다.
총선 압승을 배경으로 21대 국회 들어 폭주하는 여당의 고위 당직을 맡은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상위 1%’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걸 보고 나는 경악했다. 상위 1%면 50만명이다. 이 나라에는 청산해야 할 기득권이 50만명씩이나 되는 걸까. 그들이 상층에 있든, 하층에 있든 50만명의 국민을 쉽사리 배제하는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추미애 장관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열어놓는다. 하지만 현직 법무부 장관이 우리가 만들어놓은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인 국회와 국회의원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자신에 대한 개연성 있는 문제제기가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 때문이라고 공공연하게 단정짓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을 뿌리 뽑는 일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해도 정당하다는 태도는 포퓰리즘의 교과서가 아니던가.
포퓰리즘은 형식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선한 다수와 악한 소수, 그리고 후자를 궤멸하기 위한 권력 위임이라는 형식을 갖고 다양한 내용의 포퓰리즘이 변주된다. 좌파 포퓰리즘만 있는 게 아니라 우파 포퓰리즘도 있고 심지어 중도 포퓰리즘도 존재하는 이유다. 우파 포퓰리즘도 선한 다수와 대비되는 악한 기득권층을 설정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이 악한 기득권층은 흔히 외부의 어떤 세력을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 외부 세력의 단골 후보는 물론 ‘빨갱이’이고, 다음 후보는 ‘이민자’다. 야당과 극우 보수층에서 대통령과 좌파 기득권(내로남불 강남좌파)이 친중일변도에다 심지어 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바치려 한다는 극단적 주장은 우파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저 부패한(좌파 이념에 물든) 기득권(내로남불 집권세력)이 나라를 망치지 못하도록 대다수 선량한 국민이 나서야 한다는 호소도 내용은 텅 빈 채 포퓰리즘 서사의 형식만 갖추고 있다.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모두가 섀도복싱만 하고 있다. 섀도복싱에는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다. 청산해야 할 50만명의 적폐세력도, 나라를 북한에 바치려는 빨갱이 세력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싸우지만 사실은 싸우지 않는다. 내가 국민을 위해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하고 있으니 나에게 힘을 달라는 제스처일 뿐이다. 이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고 포퓰리즘의 위험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대통령뿐이다. 정치적 명운을 걸고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아직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포퓰리즘의 변주를 멈추고 정상적인 국정을 회복한 대통령이라는 업적을 남길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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