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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인간으로 보이잖아요. 근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본인이 지향하는 특정한 가치만은 한 번도 버린 적 없어요. 가끔 존재하죠. 그런 사람들이.” 제주에 출장 오신 선생님과 식사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분이 누군가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언급하신 그 공인에 대해 사실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저 말씀은 깊이 닿았다. 발화내용에 동의했다기보다 발화자의 시선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위안 같은 걸 받았다. 다음날 커피 마시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아침 방송에서 본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농담의 소재인 줄 알고 키득거릴 채비하던 내게 그분이 이야기했다. 겉으론 실리를 추구하며 세속에 젖어 사는 것처럼 보여도 혀끝만 정의로운 자들보단 세상에 무언가 더 보태는 이들이 있다고. 그런 일상의 삶들을 자신은 좋아하며, 지켜주고 싶다고.

난 ‘실리적’ 혹은 ‘세속적’보단 차라리 ‘몽상적’이나 ‘착한 척’ 같은 비판이 어울릴 부류에 속한다. 또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까지 추구할 어떤 가치를 품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선생님이 지켜주시려는 대상 범위에 아마 포함되지 못할 거다. 그럼에도 스치듯 하신 저 두 이야기가 마음에 깃들어 지금껏 떠나지 않는다.

드물지만, 살면서 이따금 아름다운 결을 지닌 이를 만난다. 남루한 차림 속에서 형형히 빛을 발하는 깨끗한 얼굴 같은 사람. 반듯하고 견고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진 사람. 단단한 갑옷 틈새로 무언가 닿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사람. 사회적 가면을 쓴 무리 안에서 그런 희소한 존재들을 감별해낼 줄 안다는 데에 난 자긍심을 가졌다. 그들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며 내가 그들을 곧장 알아보았음을 상기하면 내면에 램프가 환하게 켜지곤 했다.

한편 누군가의 빈틈을 우연히 목도하기도 한다. 세련된 매너에서 어색함을 감추려는 몸짓을 읽었을 때나, 냉소 이면의 뜨겁고 서투른 열정을 보았을 때. 사람을 막연히 동경하는 건 상대의 매력과 장점 때문일지라도 그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는 건 저런 빈틈을 통해서였다. 더 나아가 내가 지닌 모종의 빈틈으로 타인의 그것을 알아차리고 ‘네가 바로 나구나’ 확인하기도 한다. 특히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모델이나 근사한 멘토는 되지 못할지라도 군중의 틈바구니에 숨은 ‘수줍어 인사 못하고’ ‘소심해서 예의 없는’ 얼굴들을 알아보고 이해의 눈길을 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결을 가진 존재들. 빈틈을 통해 가까워진 관계들. 나와 닮은 취약성을 지닌 이들. 이제껏 내가 세심히 살피며 다정한 시선을 보내온 대상 범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저 세 범주 너머엔 너그러움을 가장한 채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다. 고백하면 일부에겐 경멸감을 품었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거나 동정심과 비분강개로 쉽사리 정의감을 표출하려 드는 이들을 속물로 치부했다. 그들 역시 여린 속내를 지녔을 테고 저마다의 상흔을 앓았을진대 이에 대해선 알려 하지 않았다.

이렇듯 내가 입술로는 예의 바른 웃음을 꾸며내면서 내심 경멸했던 존재들에게 누군가, 적어도 한 사람은 눈길을 두는 것이다. 알아보고 지켜주고자 하는 거다. 나보다 예민하고 날 서 있을, 나보다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을 한 사람이. 그 사실은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 젊음의 마지막 반짝임마저 지워질 때쯤 나 역시 대다수의 관심 바깥의 존재일 거니까. 연구자로서의 태도는 쓸데없이 진지한데 연구성과는 대단치 않은, 강의도 재미나게 못하면서 교육자적 애착만 강한, 집도 차도 없는 주제에 가진 걸 나눈다며 얇은 호주머니를 자꾸 여는 ‘몽상적’이며 ‘착한 척’하는 자일 테니까. 그때 어딘가,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그 볼품없는 삶을 들여다보리란 희망을 내 쪽에서도 품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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