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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는 새 제국(帝國)을 선포한 고종은 2년 뒤인 1899년 8월17일, 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공포했다. 명칭을 국제(國制)라고 한 것은, 입법기관이 따로 없는 상태에서 황제 ‘마음대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총 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국제의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되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였고, 제2조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항만년(恒萬年)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였다. 나머지 7개 조항은 모두 황제의 권리만 제시했다. 황제의 의무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규정한 조항은 없었다. 황제는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할 권리, 즉 입법권을 가지니 이를 자정율례(自定律例)라 했고, 행정 전권을 장악하니 이를 자치행리(自治行理)라 했으며, 아무런 제약 없이 인사권을 행사하니 이를 자선신공(自選臣工)이라 했고, 조약의 체결 비준 등 외교 문제를 전결(專決)하니 이를 자견사신(自遣使臣)이라 했다. 여기에 육·해군을 통솔하고 계엄과 해엄을 명할 권리까지 가졌으니, 국가 운영과 관련한 모든 권리가 고종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체제를 정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주변의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군 상태에서 홀로 푸른 잎을 뽐내는 것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이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 기관과도 권력을 나누지 않고 혼자 다 갖는 것이 독재(獨裁)다. ‘대한국국제’는 황제 1인 독재체제의 본질을 명료히 드러낸 ‘모범적’인 문서였다. 조선시대 내내 불문율로 유지되던 ‘무한한 군권’을 이때 굳이 명문화한 것은, 한편으로는 독립협회가 시도했던 ‘군주권의 침손’을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갓 형성된 세계체제에서 문명국의 일원(一員)이라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0세기를 목전에 둔 당시 시점에서 ‘명문화한 독재권’이 국제적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1910년 10월1일, 일본 칙령 제354호로 ‘조선총독부관제’가 공포되었다. 제1조는 ‘조선총독부에 조선총독을 둔다. 총독은 조선을 관할한다’였다. 조선총독의 관할권에는 어떤 제약도, 단서조항도 없었다. 조선 내 행정·입법·사법의 전권과 군 통수권까지 장악한 조선총독은 ‘조선에 관한’ 모든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독재자’였다. 그는 오직 임명권자인 일본 천황에게만 책임을 졌다.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조선 땅에 거주하는 자는 누구도 총독의 권한을 침손(侵損)하거나 침손할 의도를 가져서는 안되었다. 조선인들의 의사를 통치에 반영한다는 명목으로 설치된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그 의원들을 총독이 임명했을 뿐 아니라 하는 일도 총독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국가라는 단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이래 천명(天命)을 받은 자가 지상의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독재는 너무나 당연한 정치 행태였다. 그들은 독재가 아니라 독재권이 침해되는 것을 문제로 여겼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에도, 공적(公的) 교육기관에서 민주주의가 좋은 제도라고 가르친 적은 없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도라고 주장했고, 조선인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한국 지식인들이 일부나마 민주주의를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부터였다. 한국인들이 3·1운동으로 독립을 선언한 뒤 민국(民國)을 수립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세계사적으로도 경이로운 정치의식의 발전이다. 그러나 대중의 정치의식 일반이 비약하지는 못했다. 1948년 제헌국회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충실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설계했으나, 이승만은 곧 이 설계도를 찢어버렸다. ‘마름의 권리’를 얻으려 한 자들과 왕이나 총독을 섬기는 데 익숙했던 자들이 이승만의 독재를 뒷받침했다. 이승만은 정치깡패를 동원하는 등의 우격다짐으로 헌법을 개정해 영구집권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이는 ‘대한국국제’가 정한 ‘자정율례’와 다를 바 없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도 이승만의 전례를 따랐다. 애초에 자기 뜻대로 만든 헌법이었지만, 그는 종신집권을 위해 그 헌법조차 내팽개쳤다. 1969년 여당 국회의원들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삼선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야당 국회의원 회유 또는 매수, 관제 데모대 동원 등 ‘고전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1972년에는 국회를 해산하고 민국(民國)을 독재국가로 만드는 헌법 쿠데타를 자행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어 입법권을 장악했고, 압력과 회유를 통해 사법부를 장악해 ‘사법살인’에 협조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긴급조치권’을 헌법에 명문화해 왕조시대 절대군주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박정희 개인이나 그의 통치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죄로 규정되었다. 박정희 사후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도 살인·고문·폭력으로 통치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이해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독재 치하에서 살아왔다. 한국인에게 독재는 머리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문제다. 그런데 정작 독재 치하에서는 그에 협력하거나 순종했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보통사람이 느끼는 걸 느끼지 못하면서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독재의 망령도 계속 이승을 떠돌 것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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