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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서울대 교수·사회학
중위투표론이란 게 있다. 두 가지 가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기준에 따라 유권자들을 한 줄로 세울 수 있을 것. 그렇게 한 줄로 세운 유권자들의 분포가 단봉분포를 이룰 것. 말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단봉분포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한 군데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을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장터가 하나밖에 없다면, 물건을 팔려면 장터에 가서 파는 게 맞다. 중위투표론이 정치권으로 건너가면 전투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원싸움이란 말로 변한다. 선거란 결국 가장 많은 유권자의 표를 가져오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으니 선거가 가까워지면 각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장터인 중원으로 모인다.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재·보선 이후 민주당은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원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며 보수화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반값 등록금처럼 과감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고, KBS 수신료 인상안에 별 고민 없이 동조했다가 빗발치는 여론에 화들짝 놀라 몸싸움도 불사하는 식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주당 입장에서 내년 선거에 중원싸움은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고정지지층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일정 정도 좌클릭 하면서 중원을 압박하려 들 것이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볼 것이다.
민주당의 성패는 중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개혁적이고 진보적이지만 그 동안 투표하지 않던 유권자들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그 효과는 이미 20% 이상의 사전조사 결과를 뒤집어냈던 4·27 재·보선과 작년의 6·2 지방선거에서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민주당의 선전은 스스로 만들어냈다기보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이삭줍기에 가까웠다.
대선과 같이 큰 선거에서 이삭줍기가 계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그렇게 해서 집권한다 한들 큰 의미도 없다.
거기에다 유권자의 변화는 중위투표론의 두 가지 가정을 모두 무효화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을 경험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이명박 정권의 최대 약점인 소통으로 무장한 유권자들은 한 줄로 서기보다 집단지성으로 대화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들은 한 줄로 세워지기를 거부하고 ‘우리들’의 요구를 가장 잘 대표해줄 정치집단이 누구인지를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더구나 유권자의 장터는 하나가 아니라 최소한 두 개 이상이 될 것이다. 굳이 분포라는 표현을 쓴다면 단봉분포가 아니라 쌍봉분포, 혹은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중원싸움은 무의미해진다. 물건이 형편없어도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으면 팔린다는 눈치 보기가 아니라 좋은 제품으로 손님을 적극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민주당이 갈팡질팡 하는 동안 한나라당 대표경선에서 일부 후보들이 내놓고 있는 정책들과 민주당 정책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손학규 대표가 반값 등록금 집회 현장에서 대학생들과 대화하고 정동영 최고위원이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가 시장이라 쓰고 대기업이라 읽으며 국민들의 삶을 방치한 몇 년 동안, ‘사회정책’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책이라고 하면 으레 경제정책만 생각하던 한국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지탱할지를 고민하는 사회정책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민주당이 생각하는 사회정책의 큰 틀이 무엇이고, 사회정책의 틀 안에서 경제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것이며, 거기에 필요한 재정은 어떻게 마련할 것이고, 그러한 커다란 틀 안에서 등록금 문제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이며 한국인의 삶의 터전인 노동을 어떻게 정당하게 대우할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중원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걱정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이삭을 몰아주었던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2017년을 기약할지도 모른다. 민주당에 중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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