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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지극

opinionX 2021. 2. 22. 09:4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다육 한 점이 꽃을 피웠다.

아무도 몰래 살며시 이틀 잎을 열었다

다시 닫아버렸다.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천 년 비바람과 일억 광년 빛이 섞였던 것,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대’는 지울 수 없는 상흔.

이 넓은 우주에서 이 짧은 찰나에

우리 이렇게 만났다 다시 처음처럼 헤어진 것만으로

기적이고 황홀이다.

정한용(1958~)

오늘 “꽃을 피”운 “다육 한 점”을 지긋이 바라보던 시인은 ‘지극’과 ‘정성’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름 모를 다육은 오래전에 그리운 곳을 떠났지만, 흔들림 없이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과 달리 고향에 가고 싶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아프다고 칭얼대지 않는다.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두고 겨우 일주일에 한 번 물만 주었을 뿐인 데도 예쁜 꽃이라는 과분한 선물을 선사한다. 더없이 극진한 다육의 모습에 시인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단 이틀, 잎을 열었다 닫은 다육의 흔적을 바라보던 시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으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까 상념에 잠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생겨나 “천 년 비바람”을 맞고 “일억 광년 빛”을 쬐는 동안 많은 변화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시인은 짧은 인연에서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떠올린다. 만났다 헤어지는 대상은 다 ‘그대’이고,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난 건 “기적이고 황홀”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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