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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세계관’의 해가 될 것이다. 세계관을 구축하거나 세계관에 기댄 창작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는 2022년을 이렇게 예측한다. 그런데 미래의 일이다 보니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많다. 명탐정의 도움이라도 빌리고 싶다.
미스 마플(마플양)이라는 호칭으로 친숙한 독신의 할머니 탐정 제인 마플.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회색의 뇌세포’ 에르퀼 푸아로. 셜록 홈스에 버금가게 유명한 명탐정이다.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했다. 그런데 작가 스스로는 <애거사 크리스티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요즘 나더러 마플양과 에르퀼 푸아로를 만나게 해야 한다는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온다. 하지만 왜 굳이 만나야 한단 말인가? 두 사람은 그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텐데. 느닷없이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나를 사로잡지 않는 한,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글이다. 등장인물이 자기가 주인공인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의 조연이 되는 일을, 애거사 크리스티 같은 작가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팬은 좋아한다. 주인공 노릇하던 인물이 조연이 되어 빈축을 사고 고생을 하는 장면은 더 좋아한다. 팬은 작가의 뜻에 아랑곳 않고 여러 세계를 통합하고 싶어 한다. 이른바 통합 세계관이다.
세계관 작품은 유명한 창작물에 기대는 일이 많다. 마플과 푸아로는 함께 등장하지 않더라도, 원더우먼과 배트맨은 자주 어울린다(배트맨도 처음 등장할 때는 ‘복면을 한 탐정’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시는지). 스타워즈 세계관처럼 유명 원작에 기대면 유명 캐릭터를 등장시키지 않고도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처럼 작품보다 작가가 유명한 경우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복잡한 설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또 기존 작품의 팬이 따라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마플과 푸아로. 원작자 애거사 크리스티는 “느닷없는 충동”이 없다면 자기는 세계관 작품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큰돈을 벌 수 있다면 “느닷없는 충동”에 기꺼이 사로잡힐 작가도 적지 않다(나도 그렇다). 회사가 등장인물을 사용할 권리만 확보한 채 새로운 작가들을 고용한다면? 창작물을 꾸준히 생산할 수 있다. 원래 작가가 죽어도 시리즈는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창작은 새로운 단계를 맞는다. 개인 창작자의 창작물은 화분에 담긴 모종이다. 회사가 돈을 지불하고 모종을 손에 넣어 밭에 심고 가꾼다. 여기 드는 비용은 팬들이 지불한다. 개인 창작자가 아니라 고용된 작가들이 이야기 농사, 세계관 농사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