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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과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영상 시청에서는 보는 방법과 속도를 둘러싼 이야기가 꾸준히, 점점 크게 들려온다. 방법으로는 영화관에 직접 가서, TV로, 비디오나 DVD로 보던 시대가 저물고 OTT 서비스를 활용하게 되었고, 속도에서는 유튜브 등에서 제공하는 재생 속도 조정 기능을 활용하여 0.25에서 2.0까지 상황에 맞춰 적정 속도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극명한 변화를 두고 경험과 분석 두 방향 모두에서 이야기가 지속되는 상황이겠다.

얼마 전 번역 출간된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이런 세태를 빠르게 포착한 책인데,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 기능을 적극 활용하여 영상을 보는 이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전하고 있어 최근 콘텐츠 소비 성향 이해에 도움을 전한다. 저자가 전하는 현상은 이렇다. “누구도 좋은 음악을 빨리 감기로 듣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행위를 아티스트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영상을 1.5배속으로 시청하거나 대화가 없고 움직임이 적은 장면은 주저없이 10초씩 건너뛰며 시청하는 사람은 많다.” 분석은 이렇게 이어진다.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아졌고, 가성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나 빨리, 건너뛰며 보는 모습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중간까지는 보통 속도로 보다가 빨리 결말을 알고 싶어서 중간에 몇 회 정도는 건너뛰고 바로 마지막 회를 봤어요”라든가 “처음부터 계속 빨리 감기로 보다가 뭔가 상황이 바뀐 것 같은 장면은 보통 속도로 봐요. 처음과 끝만 알면 되니까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죠”에 이르면, ‘영상을 본다’는 행위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실행하는 세상이 온 것 아닌가 싶어진다. OTT 서비스에 새로 올라온 영상 목록을 보면서 마음이 동하다가도 재생 시간이 2시간을 넘어가거나 이미 서너 시즌이 진행되어 시청 시간에 부담이 가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물러서는 게 지금까지 나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보는 이들의 방식이 달라지니 만드는 이들도 이에 부합하여 작품 기획과 제작에 반영하는데, 결론을 미리 알려주는 게 실패를 피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하는 동력이 되니 1화에 전체 흐름과 결과를 모두 담아낸다든지, 대사 없이 장면으로 설명하는 연출보다는 다소 어색하더라도 인물이 직접 말로 상황을 전하게 하는 식의 변화가 작품에 반영되고, 이는 선순환을 이루어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만족도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비어 있는 시간에도 만든 이의 의도가 담기지 않겠느냐고? “제가 길다고 느꼈다면 만든 사람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도, 통하지도 않았다는 증거 아닌가요? 의도가 느껴지지 않으니 건너뛸 뿐이지요.”

저자는 이런 변화를 작품 감상에서 콘텐츠 소비로, ‘보고 싶다’에서 ‘알고 싶다’로의 흐름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필자의 수준에서는 설명보다 체험이 시급한 상황이라 일단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에 익숙해져보려 한다. 

생각해보면 책을 읽을 때는 늘 해왔던 일 아니겠는가. 책은 애초에 건너뛰기가 용이하게 만들어졌고 빨리 감기 등의 속도 조절은 책의 재미와 호흡, 나의 시간과 체력에 따라 세심하게 조절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쌓아온 독서의 기술을 본격적으로 활용해볼 시대가 열린 게 아닌가 싶어 조금은 신이 난다.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편집본부장>

 

연재 | 인문의 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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