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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원설화는 어떠할까. 영국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은 조금은 거칠게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태생이 ‘식민주의적’이라고 말이다. 가치를 뽑아내고 그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지 않으니 식민주의적인 셈이다. 히켈은 그 대표적 예로 ‘인클로저’를 든다. 농촌 공동체가 공동 관리하며 함께 사용했던 숲, 목초지, 강에 지배층이 울타리를 치고 사유화해버린 사건 말이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보통 초기 자본 축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것이 인클로저처럼 순수한 저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탈과도 같은 야만적 축적 행위에 의한 것이라 지적했다. 그와 같은 약탈은 자본 축적 이외에 평민에게 ‘굶주림’을 선사하고, 그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싼 임금노동의 굴레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 나아가 히켈은 자본가가 남성에게는 값싼 노동력을 약탈한 반면, 여성에게는 무임금으로 재생산 노동력(소위, 가사 및 돌봄노동)을 빼앗았다고 지적한다.

정리하면, 자본가들은 애초에 공짜였던 공유재 자원을 자신의 사유재로 빼앗고, 평민들의 사유재였던 노동력을 마치 자신들의 공유재인 양 제값을 치르지 않고 마음껏 사용한 셈이다. 태초에 공유재만 존재했을 때 나의 노동력은 분명 나의 사유재였을 것이다. 내가 힘들면 그만하면 되는 노동력 말이다. 그런데 공유재가 한 번 자본가의 사유재로 변할 경우 나의 노동력은 어느새 그들만의 공유재인 양 약간의 임금만을 지불한 채 물 쓰듯 사용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임금은 절대로 충분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충분할 경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적당히만 사용하고 남는 시간은 자신의 사유재로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에게 이건 소위 ‘자원 낭비’일 테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노동자에게 성실한 노동은 하나의 규범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점차 자본가의 공유재가 된 노동자들끼리 조금이라도 자신의 사유재 축적을 위해 경쟁하고 그 결과에 대한 어떤 도덕적 문제의식도 지니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더 비참한 것은 아마도 태초에 공유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 가난과 끝없는 노동의 굴레가 마치 숙명인 듯 말이다.

현재 서울지역 13개 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의 임금 협상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초 신라대 청소노동자 집단해고 이후 파업 농성 시 발생했던 여러 구성원과의 갈등만 떠올려 보아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13개 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은 올해 최저임금 인상액 시급 440원을 감안해 생활임금보장을 요구했지만, 대학들이 거부했다. 이에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조정안으로 400원을 제시하였고 13개 대학 중 12곳만 완료되어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다.

자본주의 기본 원칙은 자연과 노동이 주는 것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이라 했다. 대학들이 재정악화를 이유로 지난 수년 동안 청소노동자 인원을 감축하고 직접고용에서 간접고용으로 전환해 왔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재정악화 때문만일까? 혹은 청소노동자의 일이(과거 4명이 넘는 인원이 하던 대강의동 청소를 이제 2명이 담당함에도) 시간당 400원을 추가로 지불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비숙련 노동이라 생각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여성에게 청소 노동이란 마음껏 써도 되는 공유재라 생각해서일까?

여성주의 정치활동가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지불되지 않아 왔던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자본주의 혁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인 ‘영점’이라 강조한다. 페데리치는 서비스산업의 발달에 따라 여성의 재생산 노동력이 집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평가절하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임금노동자로서의 여성의 낮은 지위에도 연관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작업장의 공통된 특징인 불안정한 노동조건의 압력, 그리고 언제나 부족한 일손으로 인한 과중한 노동강도 또한 빼놓지 않고 비판한다. 페데리치의 이러한 지적으로부터 13개 대학 청소노동자의 일상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불되기를 거부당하는 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의 시급 400원이 마치 자본주의 기원설화에 나올 법한 약탈당한 공유재처럼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학교 안에서 강요가 아닌 자의에 의해 여분의 노동을 베풀었던 청소노동자를 마주한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다. 공감과 선의, 그리고 환대로서의 진정한 공유재에 대한 경험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그들에게 시급 400원의 사유재가 허락되지 않고 있음을 목격하며 나와 구성원들에게 남아 있을지 모르는 공감의 공유재는 과연 얼마일지 세어본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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