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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양말을 신던 봄날의 기억은 따뜻하다.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고, 흰 양말 열 켤레를 사고, 망원시장에 들러 복숭아 몇 알을 샀다. 일요일 저녁에는 면 셔츠를 입고 스키야키를 먹으며 무연고 무덤과 양치류의 우울은 밀쳐두었다. 태풍 매미가 오던 해, 여름의 철학이나 새벽 두 시 첫 눈송이를 받던 손바닥은 기억하자.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절판된 책을 빌린 행운과 당신 이마를 때리는 초저녁 싸락눈을 사랑하자. 등 뒤로 멀어지는 이별은 용서하자. 쓸쓸하고 여윈 연남동에서도 이를 악물고 견딜 만했으니까.

장석주(1955~)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연남동’이라는 이 동네는 특정한 장소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보통의 동네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약국과 상점과 식당과 네거리와 시장과 도서관이 있고, 사랑의 싹틈과 낙화가 있고, 휴일의 소박한 행복이 있고, 계절의 바뀜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사는, 이를 꼭 마주 물고 참으며 사는, 편두통을 앓는, 평범한 우리들이 있다. “푸른 양말을 신던 봄날”이라는 시구는 봄날의 신록을 떠올리게 한다. 또 풋풋하게 자라나는 풀들의 싱그러움처럼 마음에 신선하게 품은 내일의 계획과 희망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곳에서든, 어떤 때에든 우리는 이처럼 ‘푸른 양말’을 신을 일이다. “눈 온 뒤 파밭에서 파랗게 솟은 파인 듯” 발목에 푸른빛을 두를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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