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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푸름 곁

opinionX 2022. 6. 7. 10:10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햇살 개미 멧새들… 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정숙자(1952~)

이 시의 첫 행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화자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채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을 오래 지켜보며 곁으로 다가가려 한다. 불러주길 은근 기다리며 외롭고 쓸쓸한 심경을 내비친다. 그들과 함께하려면 곁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그들이 되고 싶거나 직접 만나 대화하려는 건 아니다.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스며들어 침묵보다 깊은 자연과 ‘무언의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푸름의 ‘그들’이 꼭 나무나 풀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가까이 지내다 갑자기 멀어진 사람들이나 남보다 못한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 “수평으로 쓰러”진다는 말에선 칼에 베인 나무가 서서히 땅에 눕는 극심한 고통이 느껴진다. 죽음보다 깊은 절대고독이 엿보인다. 산다는 건 보이지 않는 검에 베이며 평생 견디는 것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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