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는 졸업장을 위조해서 취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시선은 차갑지 않다. 답답한 양극화 사회에 대한 호쾌한 해킹으로 보인다. 영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수상과 인기를 누릴 때도 아무런 비난은 없다.
조국 가족의 표창장, 봉사·인턴 활동기록 위조 혐의에 대해서는 조금의 자비도 없는 강제수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권력을 쥐게 될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한 감시주체들과 같은 배율의 현미경으로 볼 수는 없다. 우군의 과도한 옹호와 검찰 비난이 백래시를 당한 것도 맞다. 하지만 이유와 어찌 되었든 영화 주인공의 귀여운 저항에 비교될 행위에 국가의 형사자원이 범죄의 경중을 무시하고 형평성에 어긋나게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생을 평가해서 졸업까지 시킨 학교가 입학 자체를 취소하는 자기부정까지 하려고 한다. 이제 법무부 장관도 후보도 아닌 사람의 가족까지 이렇게 응징하는 것은 수사의 공익성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다.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조국 장관의 사퇴와 함께 사라졌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악착같고 집요하다. 버스요금 2400원이 없어졌다고 17년 동안 일했던 버스기사를 해고하는 것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타인을 모욕했다고 해서 1년에 1만건 가까이(총 범죄기소 건수의 약 5%) 넘게 기소한다. 특히 검찰이 문제인데 학교에서 커닝을 했다고, 포스터 만드는 데 폰트파일을 썼다고 사법자원이 꼼꼼하게 동원된다. 검찰기능올림픽이 있다면 우리나라가 1등을 할 것이다. 반면 외국에서는 형사로 자주 다루어지는 증권시장 내부자거래, 담합, 시장지배적지위 남용 등에는 검찰의 칼질을 보기 어렵다. 하후상박의 미덕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검경 수사권 조정 후 서민을 향한 기소의 칼날이 자제될 것으로 보이나 경찰이 권력이나 자본에 독립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검찰이 재등판할 기세다.
하지만 검찰만의 문제도 아니다. 도덕적 승리의 기준을 검찰에 의한 기소나 구속으로 삼는 사회분위기가 지금의 ‘검찰공화국’을 만들었다. ‘검찰공화국’이 두렵다는 이재명 후보도 국제인권기준에 어긋나는 명예훼손 및 선거법 형사고발을 서슴지 않는다. 사적 영역에 공적 잣대의 칼날을 들이대는 성향은 검찰 문제를 넘어선다. 최근에는 무속인과 역술인에 대한 공격이 만연하다.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나 불자라는 것은 문제를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 개신교 주류는 현세의 복을 위해 기도하는 기복신앙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 굿과 예배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국 뉴올리언스는 토속신앙인 부두이즘을 관광상품으로 만들었고, 일본은 무속이 국교이다. 토속신앙을 죽여가면서 한류는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경제 하층에서 공정이 너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 칼럼을 통해 여러 번 말했지만 한국의 경제구조는 억압적으로 수직적이며 사회이동성은 높지 않다. 아래에서부터 올라가려는 사람들에게 시험은 너무나 엄중한 제의 같은 것이 되었고 어느 하나 사적 영역도 타인을 경쟁에서 탈락시킬 무기가 된다면 공적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해법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개혁이지만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령들이 있다. 부동산 문제가 그렇다. 민주당은 서울아파트값이 오른 것이 실정이라고 일찌감치 인정했지만 지금 내렸다고 해서 지지율이 회복되었다거나 ‘잡았다’는 탄성은 들리지 않는다. 원래부터 부동산도 이성적으로는 ‘편안한 임대’라는 분배 문제가 대다수 서민들에게 중요할 뿐 소유가 답이 아니다. 물론 ‘서울아파트가격이 서민 문제’라는 편견도 우리의 (소유)본능과 불가분한 감성이고 정치는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성에 터잡아 편견과 거리를 두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개혁의 일부는 자발에 의존해야 하지만 다른 일부는 강요의 요소 없이 이룩할 수 없다. 어차피 헌법도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모두 강요된 것이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합병이 불허된단다. 하청업체, 선사, 중견조선업체, 노동자에게 모두 좋은 일이다. 우리 기업으로 세계 조선업계를 평정하겠다는 애국심으로부터 이성적 거리를 둬야 한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오픈넷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