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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97free@hanmail.net

꼰대 기질이 발동하고야 말았다. 민들레에선 점심을 먹고 나면 각자 설거지를 하는데, 물을 콸콸 틀어놓은 채 슬로모션으로 접시 한 장을 몇 분째 닦고 있는 아이 곁으로 가 수도꼭지를 잠그며 말했다. “세제 칠하는 동안엔 물을 잠그면 좋겠어. 아깝잖아.”

새로 채워둔 세제 한 통이 일주일 만에 바닥나고, 둘둘 말아 쓰는 화장지 때문에 사흘에 한 번꼴로 차오르는 화장실 휴지통을 비워야 한다. 교실엔 몇 글자 끄적이다 만 A4 용지들이 뒹굴고, 책상에 음료라도 한 방울 흘리면 그걸 닦으려고 티슈 서너 장을 툭툭 뽑는다. 일일이 지적하기엔 너무 쪼잔한 것들이 쌓였다가 콸콸 틀어놓은 수도꼭지 앞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말을 던져놓고 보니 궁금했다. 부족할 것 없는 요즘 아이들이 ‘아깝다’는 말을 이해할까. 살면서 아까웠던 게 있느냐고 묻자 대번에 답한다. “있어요. 돈요.” “다른 건?”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린다. “어… 없는 거 같아요.” 천진한 표정의 아이에게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와 네가 튼 수도꼭지가 어떤 상관이 있는지 아느냐’ 일장연설을 하려다 접은 것은, 사람은 한마디 말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다.

지난 7월, 전국의 시·도교육감들이 모여 기후위기·환경재난 시대에 대응한 교육을 강화할 것을 선언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미 지난해 9월 서울시와 함께 ‘생태문명 전환도시’ 공동 성명을 발표했고 올해 6월엔 중장기적인 생태전환교육 계획을 세웠다. 다른 교육청들도 탄소배출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급식에 채식 선택권을 부여하고, 지역의 대안에너지 교실을 방문하고, 적정기술을 익히는 등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인류가 맞닥뜨린 중요한 과제를 공교육 속에 정책적으로 유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한편으론 유사한 활동 중심의 교육계획이 미리 보여주는 답안지 같아서 우려되기도 한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결과를 습득하는 게 아니라, 먼저 문제를 인식하고 질문하며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3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코 푼 휴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아픈 다리로 이 방 저 방 불을 끄러 다니며 ‘아깝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없이 살았던 세대의 고리타분한 절약 정신이라 여겼는데, 할머니가 아까워하는 건 물건만이 아니었다. 대학 시절, 학비를 벌겠다고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면 ‘우리 손녀 아깝다’며 어쩔 줄을 모르셨다. 지난봄, 세찬 바람에 꺾인 꽃송이를 아까워하다, 문득 아까운 마음은 아끼는 마음과 같다는 걸 알았다.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을 연결해 인과를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들을 인식하게 하는 게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용돈 말고는 아까운 줄을 모르겠다던 그 아이가 물과 공기와 햇볕과 바람과 나무를 아까워하게 된다면, 곁에 있는 이들,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 먼 나라 타인의 삶까지 아끼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보다 훌륭한 기후위기 대응 교육은 없을 것이다. 답은 그 연결감을 깊이 깨닫고 나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찾으면 된다. 간절함 속에서 나오는 문제해결의 의지는 수동적으로 익힌 정답보다 훨씬 지혜로운 해답을 찾아내지 않을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06030007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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