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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중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작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열여섯 살 청소년이 보낸 메일이었다. 덧붙여 보낸, A4 다섯 장에 달하는 기고문에는 자신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와 그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성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교의 일상이 답답했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세상이 궁금해 다른 경험들을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엄청난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고.

예전에 비해서는 좀 덜해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학교가 갖는 권위는 견고하다. 그 권위는 학교가 제 기능을 잘 수행해서라기보다는, 그 외엔 선택지가 별로 없는 독점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교의 높고 단단한 지위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처음 만난 십대에게 “어느 학교 다니니?” “몇 학년이니?”부터 묻는 것은 흔한 일이다. 종종 걸려오는 상담 전화에서 걱정으로 가득 찬 부모들의 첫마디 또한 “아이가 학교를 안 가려고 해요”이다. 본디 아이들이란 ‘학교에 있어 마땅한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두는 건 이 사회에서 도태 혹은 낙오되는 일이라는 부정적 시각이나, 당장 학교를 나오더라도 그 다음의 선택지가 별로 없는 빈약한 현실도 두려움 생성에 일조한다.

다양한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은 실제로 ‘학생’이라는 자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발생하는 모든 리스크를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한 홈스쿨러는 배우가 되고 싶어 찾아간 극단에서 3년 넘게 착취와 폭행을 당하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십대 때 찾아갔다가 이미 청년이 된 그 홈스쿨러는 “다 널 위한 거야”라는 연출가의 교묘한 모럴 해러스먼트에 빠져들어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힘들어하고 있다. 아이의 자유로운 배움을 존중해주고 싶어서 선택한 길인데 일이 이렇게 되도록 몰랐다고, 부모의 자책도 이루 말할 수 없다.

학교 바깥에서의 리스크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더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센터 개설 등 제도적 지원은 늘고 있는 추세지만, 학교 밖을 선택한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복지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 제공이 아니라 그 낯설고 불안한 길을 함께 의논하고 의지하며 걸어갈 ‘사람들’이다. 앞서 메일을 보낸 청소년은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여러 단계의 상담을 거쳐야 했는데, 상담 과정에서 “그러다 인생 망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 밖 공간에서 자신의 선택을 격려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원하던 배움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그 친구는 악담인지 조언인지 모를 어른들의 말을 보란 듯이 되받아쳤다. “학교를 나왔지만,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어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책임지고 있는 그 자신이 포기하기 전에는 쉽사리 망하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학교의 권위가 작용하지 않는 변방에서도 제 인생을 열심히 책임져보려는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도움닫기는 무엇일지 고민해볼 일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남들과 같지 않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받고 지지받는 반복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울 기회가, 비단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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