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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학회와 친교

opinionX 2022. 11. 18. 10:09

얼마 전 박사 학위를 받은 제자가 학회에 처음 발표하러 다녀왔다. 사회학자 박영신을 중심으로 해서 1970년대부터 학회지를 발간해온 유서 깊은 학회인데, 신진학자 발표 자리를 흔쾌히 마련했다. 막스 베버의 이론을 활용하여 한국 사회를 분석한 걸 높게 평가한 듯하다. 학회에서 돌아온 제자가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갓 박사 학위를 받은 저를 깍듯이 학자로 대해주셨어요.” 할아버지뻘 되는 원로학자가 30대 초반의 초짜 박사를 마치 동등한 학자인 양 존중했다. 그 어려운 막스 베버의 이론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하여 한국 사회에 적용하였다 한들, 평생 학문에 몸 바친 원로학자의 눈에 뭐 그리 대단하게 보였겠는가? 그런데도 두 세대나 아래인 젊은 박사의 연구를 귀히 여겨 초청해서 경청했다.

김덕영이 쓴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가 떠올랐다. 지금도 인구 16만명 안팎의 독일 ‘지방’의 하이델베르크. 하지만 당시 자유주의 정신이 충만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인이 몰려오는 ‘세계 촌락’이었다. 무엇보다도 막스 베버라는 학문의 거장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었다. 베버의 집은 수많은 지식인이 몰려오는 친교의 장이었다. 이를 ‘베버 서클’이라 불렀다. 여기에 참석한 게오르크 짐멜은 ‘친교’라는 근대의 새로운 사회적 형식을 이론화했다. 친교는 어떠한 실제 목적도 보류된 텅 빈 형식의 모임이다. ‘동등하면서도 독특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상호작용 과정에서 상징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야 할 실체다.

베버 서클은 ‘공화제적 귀족주의’가 지배한다. 독특한 인성을 귀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영혼의 귀족주의이지만, 모두를 동등하게 여긴다는 점에서는 공화주의가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 엄청난 ‘근대성의 거짓말’이 베버 서클에서는 현실이 된다. 영혼을 가진 존재 앞에서 우리는 압도당한다. 갑자기 영혼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나만의 고유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다. 이러한 욕망은 친교를 통해 현실이 된다. 대학 시절 박영신 선생님에게서 받은 느낌! 난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처음으로 영혼이 압도당했다. 영혼의 귀족 앞에 발가벗겨진 채로 서 있는 천민의 부끄러운 모습. 내가 지금 학문의 장에서 한구석이라도 차지하고 공부하는 건 압도당한 천민이 영혼의 귀족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열망은 또 다른 친교의 장을 통해 전염되었다. 베버로 박사 논문을 쓴 제자가 친교의 장인 학회로 초청받아 발표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향’이었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강사제도 기여대학 지원 사업비’를 전액 삭감했다. 강사는 정부 재정을 갉아먹는 불필요한 잉여 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강사는 누구인가? 대학이 키워낸 학문 후속세대다. 이들이 대학에서조차 안정된 강사 자리 하나 얻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학문의 길을 가려고 하겠는가? 무기 팔아 돈 벌었다고 자랑하는 나라답게 누구나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걸 배워 돈과 권력을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도대체 돈을 벌고 권력을 얻어 ‘결국’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베버의 가족사는 이에 대한 답을 준다. 베버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아마포 가내공장을 운영했다. 베버 아버지는 재산권 수호를 사명으로 하는 부르주아 기술인 법을 공부해서 정치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장남인 베버가 법을 공부해서 집안의 전통을 이어나가기를 바랐다. 베버도 처음에는 집안의 기대에 맞추어 법을 공부했다. 상인도 3대에 이르니까 영혼에 눈을 뜨는가, 법 기술 대신 사회학을 공부했다. 모국어인 독일어로 학문을 해서 인류에 이바지하는 영혼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우리 모두 그 이야기를 읽는 복을 누리고 있다. 한국 사회가 돈벌이에 몰두한 지 벌써 두 세대가 지났다. 이제 3대에 이르렀으니 친교의 장에서 모국어로 우리만의 영혼의 이야기를 창출해 인류에 이바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연재 | 세상읽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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