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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국가전략의 부재 또는 빈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했지만 5년 단임 정권을 책임진 주체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법 87조에 따라 제정된 국가안전보장회의법을 포함한 어느 법령에도 ‘국가안전보장’ 및 ‘국가안보’의 정의는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벤치마킹하여 2004년 처음으로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발간, 국가이익(국가목표)을 “국가의 생존, 번영과 발전 등 어떠한 안보환경하에서도 지향해야 할 가치”로 정의했을 뿐이다. 

이후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국가이익(목표)은 온데간데없이 정권의 이익과 전략이 마치 국가이익과 전략인 양 호도됐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태생 탓에 강대국들이 내뿜는 세력정치 자장(磁場)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음에도 5년마다 나타났다 사라진 역대 정권은 예외 없이 국가안보의 한 축인 외교정책을 지지층만을 의식한 국내정치 공학적 관점에서만 다루면서 국가이익과 국가전략의 본래 의미가 실종되는 데 한 요인을 제공했다. 그사이 외교가 차지하는 공간은 눈에 띄게 축소됐다. 더군다나 ‘청와대 정부’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에서 외교부가 독자적으로 공간을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불길한 징후는 이미 예고됐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외교부에)그렇게 훌륭한 엘리트들이 많이 모여있는데도 우리 외교역량이 우리나라의 어떤 국력이나 국가적 위상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는 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문 대통령은 외무고시 출신에다 특정 학맥 중심의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과거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외교부에 대해 유사한 지적들이 있었다. 그 후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서도 외교부의 뼈를 깎는 환골탈태는 없었던 셈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대사에 외교직 공무원들을 철저히 배제했고, 외교수장에 외교부 주류와는 거리가 먼 외부 인사를 임명했다. 이때만 해도 외교부의 ‘워싱턴 스쿨’ ‘저팬 스쿨’ ‘차이나 스쿨’처럼 폐쇄적 순혈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로 해석됐다. 

그러나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부 혁신이 실패를 넘어 자칫 외교의 위기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위법행위, 깐풍기 대사, 명칭 오기, 그리고 구겨진 태극기 게양에서 드러난 일부 외교부 직원들의 기강해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독 회담 2분’이 상징하는 한·미관계의 불편한 진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무산 등이야말로 한국 외교의 위기를 알리는 대표지표이다. 

이처럼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진 한국 외교 위기의 본질은 국가이익 전략의 부재에 기인한다. 그래서 묻는다. 임기 중반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부는 정권을 넘어서는 국가이익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하겠다는 로드맵 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북한 비핵화가 국가목표 중 하나라면 비핵화에 대한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대상으로 양자 간 국익을 정하고 이에 따른 전술이 아닌 전략을 마련했는가? ‘늘공’들을 의전과 현안으로 내몰고 ‘어공’들 위주로 냉엄한 강대국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존망을 가를 수 있는 국가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야인시절 쓴 책에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전략실 제2차장 관련 일화가 소개돼 있다. 김 차장이 오래전 외교통상부 외교통상교섭본부장직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외교통상부는 장교 요원을 뽑아 사병으로 쓴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 차관 역시 “정치적 리더십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은 관료집단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국가이익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유연한, 창의적 외교전략을 수립하기를 기대한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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