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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11월

opinionX 2022. 11. 21. 10:41



나를 한 장 넘겼더니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

당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의 마지막 외침을 흔들어 버리면
새가 떨어진 침묵을 쪼아 올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하늘 아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깊고 깊어서
부스러기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는 기억들

미처 사랑해 주지 못했던 사랑처럼
남겨진 몇 개는
그냥 두기로 했다

오래된 노래처럼
내 귓속에서 흥얼거리며 살도록

이영옥(1960~ )


11월 달력을 떼어내자 12월 한 장만 남는다. 벽에 걸 때만 해도 곳간에 그득한 양식 같던 한 해가 어느새 다 지나갔다는 회한에 젖는다. 회한은 반성과 자책으로 이어진다. 연초에 세운 목표는 달성했는지, 잘못한 거나 아쉬웠던 건 없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11월은 거울 앞에 선 나를 마주하는 달이다. 감상에 빠질 새도 없이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듯한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지만, 미처 주지 못한 사랑은 “그냥 두기로” 한다.

당신은 사정없이 마음을 흔들어대곤 뒤돌아선다. 곁에 있어 달라는 간절한 애원에도 매몰차게 떠난다. 당신 없는 세상에서 바닥에 구르는 낙엽처럼 바스락거린다. 깊은 절망감에, 뼈만 앙상한 기억으로 이별의 슬픔을 견딘다. 자존감도 낮아진다. 하지만 12월이 가기 전에 새로운 달력이 벽에 걸린다. 봄이면 나무에 새싹이 돋아난다. 메마른 가지 같던 침묵이 음악으로 바뀌고, 당신에 대한 기억은 추억이 된다.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김정수 시인>

 

 

연재 | 詩想과 세상 - 경향신문

 

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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