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를 강의하는 김재인 박사가 양손 가득 새 책을 들고 왔다. 자신이 번역한 를 수강생 수에 맞춰 예약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들고 온 것이다. 교정 전의 번역 원고를 복사해 공부하던 수강생들이 새 책을 받아들고 반색했다. 누군가가 와인을 준비했고, 강의실이 잠시 새 책 사인회장으로 바뀌었다. 사인을 하는 김 박사의 표정도 아이처럼 밝았다. 그러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어 원서 500쪽, 한글본 700여쪽, 책을 번역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지 않은가. 그러나 내막을 알고보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학술서로는 드물게 2000부를 찍은 이 책을 번역한 대가로 김 박사가 받을 인세는 세전 330만원. 그러니까 그 난해한 책을 10년에 걸쳐 번역하고 330만원을 번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초판을 2..
우리 세대의 인문학 연구자들이 처음 대학 강단에 설 때, 선배 교수들은 3년에 논문 한 편씩을 쓰면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해는 주제를 설정하여 자료를 모으고, 한 해는 논문을 구상하여 얼개를 짜고, 마지막 해는 논문을 집필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매우 넉넉했을 것 같지만 그때에도 논문 쓰는 사람들은 크게 압박을 받았다. 진지한 연구자들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논문에 자신의 미래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이 넉넉한 시간을 용서하지 않았다. 언론사의 대학평가가 시작되면서 학교는 교수들에게 1년에 최소한 논문 한 편씩을 쓰라고 독려했다. 특히 IMF 사태 이후에는 ‘교수 철밥통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존경 받는 교수 같은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