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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강의하는 김재인 박사가 양손 가득 새 책을 들고 왔다. 자신이 번역한 <안티 오이디푸스>를 수강생 수에 맞춰 예약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들고 온 것이다. 교정 전의 번역 원고를 복사해 공부하던 수강생들이 새 책을 받아들고 반색했다. 누군가가 와인을 준비했고, 강의실이 잠시 새 책 사인회장으로 바뀌었다. 사인을 하는 김 박사의 표정도 아이처럼 밝았다. 그러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어 원서 500쪽, 한글본 700여쪽, 책을 번역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지 않은가.

그러나 내막을 알고보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학술서로는 드물게 2000부를 찍은 이 책을 번역한 대가로 김 박사가 받을 인세는 세전 330만원. 그러니까 그 난해한 책을 10년에 걸쳐 번역하고 330만원을 번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초판을 2000부나 찍었다. 요즘 흔히 그렇듯이 500~1000부를 찍는 인문서의 번역자가 받는 대가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언어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분야에 대한 고도의 학문적 역량 없이는 손도 댈 수 없는 책을 번역한 대가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해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연구재단과 대학 업적 평가에서 번역은 점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일부 인문서의 번역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내용이 번역을 거치고 나면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문으로 바뀐다. 이런 와중에도 좋은 번역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일부 학자들의 학문적 소명감 덕분이다. 학술서 번역의 지난함은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논문에 비할 바 아니다. 오역의 위험은 상존하고 이는 경우에 따라 번역한 학자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문학 저서 집필의 경우도 비슷하다. 특히 대학교수들이 번역이나 저서 집필을 기피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학자들이라고 저간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번역이나 저서 집필에 나선다. 책 없는 인문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학자들이 책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강의와 세미나다. 강의를 바탕으로 준비되는 책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만도 여러 권이다. 당장 <안티 오이디푸스>를 강의하는 김재인 박사만 해도 강의 결과를 <안티 오이디푸스 주석서>로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모든 강의는 녹음돼 꼼꼼한 녹취록으로 만들어진다. 신익상 박사의 <현대 과학 산책> 강의도 책으로 쓰기 위해 녹취록으로 만들어졌고, <유마경> <미란다왕문경> <중론> 등을 가르친 명법 스님의 강의도 저서 집필을 위해 녹음되었다.

2년 가까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강독하고 있는 진태원 박사는 <에티카> 번역 초고가 곧 강의 자료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강의하는 이종철 박사도 매 강의마다 자신이 번역한 초고를 들고 오는 학자다. 김주일 박사는 자신이 번역한 <유명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 초고를 강독하며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강의한다. 이는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강의하는 문병호 박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강의에 번역 초고를 쓰는 것은 번역의 완성도와 가독성을 높이면서 강의 도중에 수렴한 의견을 주석 등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나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원전 대신 영문 번역본과 한글 번역 초고를 들고 강의에 참여하는 수강생들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번역과 텍스트 생성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셈이다.

철학자 진태원 박사


강의 자료를 아예 저서의 초안으로 준비해오는 학자도 있다. 지난 2년 동안 <푸코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강의해온 심세광 박사는 매 강의마다 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에 이르는 저서 초고를 강의 자료로 배포했다. 강의 자료를 책의 초고로 준비하는 건 그가 새해부터 강의할 계획인 <비판적 삶을 위한 현대 사상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다. 니체와 프로이트,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보드리야르, 사르트르를 거쳐 알튀세르,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 이르는 사상의 흐름을 다루는 그의 새 강의 기획은 또 한 권의 현대철학 입문서 기획이기도 하다.

사실, 강의나 세미나가 책의 집필로 이어지는 정황은 여타 인문학 공동체도 비슷하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영미현대철학> 등은 철학아카데미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출간된 책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가 강의와 세미나를 바탕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생산한 저서의 양과 질은 웬만한 인문대학을 훨씬 능가한다. 길담서원에서는 매회 주제를 변주해가며 진행하는 청소년 인문학 과정을 한 번씩 마칠 때마다 그 결과를 책으로 출판한다.

인문학 공동체 사람들 역시 돈을 주고받으며 강의와 세미나에 나오지만 참여 학자와 시민들은 단순한 지식 소매상이나 소비자가 아니다. 돈이나 업적으로는 계산이 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인문학 지식의 가장 중요한 생산자이기도 한 것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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