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이었다. 교회는 놀이터이자 유치원이었고, 성경책이 동화책이었다. 전도사님과 목사님은 선생님이었으며 하나님은 아버지였다. 입버릇 같던 ‘아버지하나님’에 분노한 아버지의 꾸지람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래도 교회 가는 일이 즐거웠다. 어린 마음속의 예수님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늘 사회적 약자에게 손 내미는 의롭고 친절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부족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분 아닌가. 나는 그분을 존경했고 사랑했으며, 매일 만나고 싶었다. 어머니들은 식당에서 밥을 퍼주며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교회의 주요 보직은 아버지들만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어렸고 무엇보다 젠더관념이 없었다. ..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금기시해온 동성애·이혼·혼전 동거에 대해 포용하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가정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티칸에서 소집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는 “교회가 동성애자와 이혼자, 결혼하지 않은 커플은 물론 이들의 아이들도 환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중간보고서를 발표했다. 특히 이 보고서에 가톨릭이 그동안 죄악시해온 동성애를 종교적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은 실로 놀랍고 뜻깊은 변화다. 가톨릭은 남녀 간의 결혼만 인정하는 성경 교리에 따라 지난 2000년 동안 동성애를 ‘내재적인 장애’로 여기며 반대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혼과 동거도 금기시했다. 하지만 그간 가톨릭이 교리주의에 갇혀 동성애·이혼·동거가 늘어나는 세상의 현실을 외면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현실과 교리의 괴리..
서소문(소의문)은 서울성곽에 있는 사소문 중 하나다. 서소문은 사대문 및 사소문 사업의 일부로 태조 5년(1396년)에 건립됐다. 원래 이름은 소덕문인데 보통 서소문이라고 불린다. 강화군 또는 인천군을 향하는 관문으로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철거됐다. 한양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사소문 중 서소문과 광희문밖에 없었다. 한국천주교 역사에 약 1만명의 순교자가 있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100여명의 천주교인이 서소문에서 처형됐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주재로 서소문의 천주교 순교자 44명이 성인품에 올려졌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서소문의 순교자 27명이 시복됐다. 다산 정약용의 형 약종(1760∼1801)도 이곳에서 참수됐다. 서소문은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