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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1)
[아침을 열며]대의 불충분 또는 불가능성

2016년 5월28일 구의역 승강장에서 김모군(19)이 안전문에 끼여 숨졌다. 구의역 사고 이후 정치권에선 노동자 안전사고에 기업 책임을 묻는 법안을 잇따라 발의했다. 2007년 영국에서 제정된 ‘기업 과실치사 및 살인법’을 본뜬 ‘기업살인법’을 추진하겠다는 정치인도 나왔다. 2017년 11월 현장실습생 이민호군(18)이 컨베이어벨트가 역주행하는 바람에 압착기에 눌려 숨졌다. 여야 국회의원이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을 냈다.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24)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죽은 뒤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이 추진됐다.실제 산업재해를 제때 제대로 막는 입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김군 사망 이후 기업살인법이 추진됐다면 김씨의 죽음은 없었을지 모른다. 당시 발의되거나 추진이 발표된 법안..

주제별/노동, 비정규직 2019. 1. 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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