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진 어시장에 갈 기회가 되면 나는 오징어를 유심히 관찰한다. 피부의 갈색이 옅어지면서 색이 달라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심심풀이 땅콩과 함께 오징어를 흔한 먹거리로 취급하지만 바다에서 유영하는 오징어나 문어 또는 갑오징어가 주변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색을 바꾼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이들 두족류 동물은 어두운 바위에 앉으면 진한 갈색으로, 모래 위를 헤엄칠 때는 옅은 모래 빛으로 자신의 피부색을 바꾼다. 2019년 3월 미국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학 연구진은 오징어나 갑오징어가 피부 층층이 다양한 색소 주머니를 갖고 있으며 빛의 밝기에 따라 이 소기관의 크기를 변화시켜 색소의 농담(濃淡)과 패턴을 조절한다는 논문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했다. 빛을 감지한 오징어의 뇌가 신호를 보..
가방을 잃어버렸다. 지하철 선반 위에 둔 것을 잊고는 그냥 내렸다. 10분쯤 걷다가 무언가 허전해서 돌아보니 항상 메고 다니던 가방이 없었다. 그러나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상수역에서 나의 가방을 싣고 응암역 방면으로 출발한 6호선 지하철은 은평구를 순환하고 다시 상수역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하철에 이것저것을 많이 두고 내렸지만 순환선인 2호선을 주로 탄 덕분에 한 바퀴를 돌아온 지하철을 다시 타고 분실물을 찾곤 했다. 이게 뭐가 자랑이라고 적고 있는지 민망하지만, 순환선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열차가 돌아나오는 시점만 잘 맞춘다면 대개 찾을 수 있는 것이다.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마포구청역쯤을 지나고 있을 지하철의 위치를 감안해 새절역으로 전화를 걸었다. 11시57분..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가 2년 전 출범할 때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다. 4차위가 내놓은 기본 정책방향 대부분이 창조경제의 바탕이 된 ‘지능정보사회 종합대책’과 겹쳤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부분이기도 했다. 벤처업계도 “창조경제나 혁신경제나 4차산업이나 다 개념은 같다”고 말한다.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창조경제의 실패를 기억하는 국민들에게 4차위가 내놓은 대답은 ‘사람’이었다. 기술과 산업의 변화를 따라가는 정책을 발굴하되, 그 논의의 중심에 사람을 둔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럴싸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인 “사람이 먼저”와도 어울렸고, 때마침 ‘우버’ 등과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노동소외 현상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한창 제기되던 시기였다..
수능이 다가오는지 아침저녁 쌀쌀함이 배나 더하다. 밤새 내린 이슬로 아침 마당이 촉촉하다. 뽀글이 점퍼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만날 찾아 입게 된다. 아이들아! 대학에 합격하려면 ‘재수 없는 꿈’을 꾸면 된단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야 또 많단다. 입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야무지게 책상에 달라붙어 책을 읽곤 한다. 그러다보면 하루가 금세 휙 지나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깐. 가르치는 일보다 배우는 일이 훨씬 즐겁다. 매주 설교를 하는 목사가 아니라서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다. 입으로 뱉은 말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유란 그래 말을 앞세우지 않고 몸으로 먼저 살 때 차오르는 기쁨이 맞다. “울안의 닭은 배불러도 솥 안에 삶아지고, 들판의 학은 배고파도 천지가..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에는 주인공 허숭이 의사와 다투는 대목이 나온다. 의원을 찾은 허숭이 마을 환자들을 치료해 달라며 왕진을 청하자, 의사는 대뜸 선금을 내라고 큰소리친다. 게다가 차비는 환자가 부담하고 자동차가 닿지 않는 곳은 두 배의 진료비를 내야 한다고 하자, 허숭은 “그러면 가난한 농민들이 병이 나면 어떡하느냐”며 따진다. 이른바 왕진을 둘러싼 소동이다.왕진(往診)은 의사가 직접 환자의 집을 찾아가 진료하는 일을 말한다. 의원이 드물고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옛날, 왕진은 의사 진료의 전부였다. 가죽가방을 들고 환자를 찾아가는 의사의 모습은 ‘인술의 상징’으로 비쳤다. 왕진은 최근까지 지속됐다. 춘원이 소설을 쓰던 1930년대만 해도 전체 진료 건수의 30%를 차지했을 정도로 성행했다. 그러..
서울남부지법 제13형사부는 30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딸 등의 부정채용을 지시한 혐의(업무방해)로 기소된 이석채 전 KT 회장에 대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2012년 신입사원 공개채용 과정에서 11명의 부정채용을 지시해 KT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했다. 채용비리는 기회 균등이라는 사회정의를 무력화하는 반사회적 범죄다. 이런 점에서 이 전 회장 등에게 선고된 형량은 결코 무겁다 할 수 없다. 재판부는 “부정채용으로 KT는 신뢰를 잃었고, 수많은 지원자들에게 큰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겨줬다”고 했다. 당연한 지적이다. 당시 KT의 공채 경쟁률은 81 대 1에 달했다. 그런데 ‘힘센 부모나 친척’을 둔 지원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가볍..
한국 대법원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지 30일로 1주년을 맞았다. 당시 대법원은 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11 대 2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며 도리어 한국을 상대로 경제보복을 강행했다. 이후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한 한·일관계의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1년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신일본제철의 반인도적 행위로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피해자들은 60년 넘게 기다린 끝에 2005년 한국 법원에 첫 소송을 제기했고, 13년여 만에 확정..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0일 ‘조국 파문’에 대해 “여당 대표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국민 여러분께 매우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면서 대국민사과를 했다. 이 대표는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이 검찰개혁이란 대의에 집중하다 보니 국민, 특히 청년들이 느꼈을 불공정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좌절감은 깊이 있게 헤아리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가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 전 법무장관이 사퇴한 지 16일 만이다. 이 대표의 사과는 때늦은 감이 있다. 그나마도 최근 당내에서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갈 수는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조 전 장관 지명과 사퇴 과정을 겪으며 야당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