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동시에 기회라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 미래를 읽어내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국력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1997~1998년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한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다급한 외환 부족을 메꾸느라 동분서주했고 국민은 금 모으기로 화답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외부조직에 의해 강요된 각종 계획은 급한 불을 끄는 선에서 끝났고 금 모으기로 단합을 보였던 한국 사회는 진영대립의 사회로 변모했다. 한국 사회는 혹독한 경제위기 상황을 겪으면서도 고질적인 노사 관계나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우연히 중국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데 그쳤다.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외환위기와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파악조차 어렵다. 이번 사..
4·15 총선에서 참패를 당한 미래통합당이 대혼돈에 빠졌다. 통합당은 28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임명안’을 4개월 임기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김 위원장 내정자는 사실상 이를 거부했다. ‘부결보다도 못한 가결’이란 뜻에서다. 통합당은 8월31일 전당대회 개최를 명시한 당헌을 바꾸기 위한 상임전국위를 열려 했으나 정원의 과반을 채우지 못해 불발됐다. ‘김종인체제’의 무기한, 전권 행사 요구에 대한 당내 반발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통합당은 그동안 비대위를 구성하자는 의견과 조기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견해가 맞선 채 내홍을 겪어왔다. 이 때문에 현역 의원과 당선인의 의견을 수렴해 ‘김종인 비대위’체제로 가닥을 잡았는데, 오히려 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든 것이다. 선거에서 시민에게 철저히 ..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윤리위원회는 28일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제기된 양정숙 당선인을 제명하고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변호사 출신인 양 당선인은 4·15 총선에 출마하면서 92억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4년 전에 비해 43억원 늘어난 액수다. 서울 강남과 서초에 아파트 3채, 서울 송파와 경기 부천에 복합건물 2채를 보유한 양 당선인은 재산 증식 과정에서 가족 이름을 도용하고 세금을 탈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양 당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설립한 정수장학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한 이력에 대해서도 당에 거짓 해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당선인이 의혹을 부인하며 사퇴를 거부하자 시민당은 결국 그를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총선 후보로 공천해 뽑아달라고 해놓고 뒤늦게 잘못 골랐다며 당선..
“어떤 선배들은 60만큼 알면 70을 말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60만큼 공부해가도 40정도밖에 이야기 못해요. 언니, 저같이 말주변 없는 사람은 공부 그만두어야 할까요?”대학원 첫 학기 때였다. 세미나를 마친 후 의기소침해하던 내게 선배가 이야기해 주었다. 굳이 70을 ‘말’하려 애쓰지 말고, 그 노력으로 80을 알기 위해 더 ‘공부’하라고. “60 알면서 70인 척하기보다는 아는 건 80인데 70까지만 드러내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렇게 80, 90을 배워 알게 되면 언변 같은 건 저절로 따라오는 거야.” 그 조언은 마음에 깊이 닿아 대학원 시절 행위방향을 설정하는 나침판이 되었다. 차츰 배움이 쌓이면서 선배 말대로 언변도 서서히 따라와주었다. 아는 만큼 쓰고, 쓴 만큼 말하게 된 듯했다. 그러다 ..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고용 충격이 통계로 속속 확인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28일 발표한 ‘사업체 노동력 조사’에 따르면 지난 3월 1인 이상 사업체 종사자 수는 1827만8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22만5000명(1.2%) 감소했다. 사업장 노동자 수가 감소한 것은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09년 6월 이후 처음이다. 지난 17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의하면 지난달 취업자 수는 전년 동기 대비 19만5000명이 줄었다. 이제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실업대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다. 코로나19가 야기한 고용 충격은 균일하지 않았다. 고용이 불안정한 임시일용직과 특수고용직 등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집중타를 맞았다..
“18세 소녀는 자신이 칼끝으로 위협당했다고 해놓고는 얼마 안 있어 지어낸 이야기였다며 말을 바꿨다. 우리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 여기다.”2009년 3월12일 미국 워싱턴주 린우드 지방법원. 허위 신고죄로 기소된 18세 여성 ‘마리’는 법정에서 자신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다가 경찰의 추궁에 못 이겨 진술을 번복한 것이다. 마리는 소송 비용까지 떠안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년 반쯤 지나 콜로라도에서 유사한 수법의 연쇄 성폭행범이 검거되고, 마리도 피해자였음이 밝혀진다. 이 사건을 다룬 탐사전문매체 프로퍼블리카의 르포르타주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는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국내에도 발간된 동명의 저서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가 제작됐다.당..
1만2000명을 앱 공지 하나로 일거에 내쫓은 ‘타다’. 타다는 이 해고를 실행한 이후 고작 3일 만에 신규사업 설명회를 열었다. 기존 타다 드라이버들은 실직에 코로나19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는데, 타다는 택시기사들을 모집해 새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차량 대수를 현재의 10배까지 늘리겠다는 공격적인 포부도 밝혔다고 한다. 타다는 드라이버들을 신속하고 완벽하게 버렸다.타다의 본질은 렌털이 아닌 운송이다. 타다의 소비자는 차량을 빌리려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장소까지 이동하기 위해 타다를 부른 것이다. 택시와 본질이 같다. 고객층도 겹친다. 택시업계가 격렬히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타다 경영진은 타다를 지지하면 혁신, 반대하면 구태라는 입장만 고수했다. 타다 실패의 책임은 이재웅·박재욱 ..
수원의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40년 된 책방 직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오래된 책방인 만큼 오래된 단골도 많았는데 그중에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등이 많이 굽으신 꼬부랑 할머니였는데 언제나 문 앞에서 독특한 억양으로 “안녕하세요오~” 큰 소리로 인사한 뒤에 카운터로 천천히 걸어와서 가만히 손을 내미셨다. 책이 아니라 손을 내미셔서 처음엔 당황했는데 곧 다른 직원이 달려와 백원을 꺼내서 할머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책방에 매일 오셔서 백원씩 받아 가신다고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원씩만.가장 오래 일한 직원보다 더 오래전부터 오셨다는 것만 알 뿐, 언제부터 오셨는지, 어디에 사시는지, 왜 백원씩만 받아 가는지, 하루에 몇 군데를 들르시는지 아무도 몰랐다. 인사와 백원만 오갈 뿐 다른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