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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새해 벽두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주에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가 모두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가 위기를 화두로 들고 나왔다. 김무성 대표는 이 시대가 “위험과 불안의 시대”라는 국민의 우려에 공감을 표시하며 말을 시작했고, 문재인 대표는 “총체적 위기”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서민의 삶이 위기에 빠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이러한 진단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이 위기론에 동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위기론 확산에도 앞장을 서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면 그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와 여당에 있기 때문에 이들이 위기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사실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물론 정부와 여당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현재 밀어붙이고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나아가 총선에서 야당을 반개혁적 세력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단기적 정치전략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국가위기론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골든타임”이라는 표현을 남발해왔다. 골든타임은 사전적으로 “뇌졸중·심근경색 등이 발생한 응급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발병 초기의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심각한 위기 상황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말이다. 지난해 말에는 노골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운운하며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압박하기도 했다. 즉 정부·여당은 이미 위기론을 통치에 활용해왔다. 위기론은 정부·여당의 주요 통치전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매우 어이없는 상황이다. 국민 삶의 불안이 증가하는 주요 원인도 대기업에 편향된 경제구조와 낮은 복지 수준에 있다. 정부·여당 스스로도 지난 선거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집권 이후 주요 공약을 걷어차며 국민의 삶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다. 북한의 핵능력도 보수정부 8년 동안 3차례 실험이 진행되며 이제 ‘수소탄 실험’을 공언할 정도로 강화됐다. 8년을 보수정부가 집권하고 있는데 국가위기 상황은 마치 자신에게 전혀 책임이 없는 사태처럼 이야기하고, 나아가 그 책임을 야당 등 다른 주체들에게 전가하는 화법은 여러 유체이탈 화법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이는 정부·여당이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우리 사회는 삶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에 빠지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골든타임”에 준하는 진짜 위급한 상황이 나타날 경우 정부·여당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우려된다. 역사적으로 위기론을 앞세워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려고 한 집권세력의 시도는 국민에 대한 억압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현재 진행되는 사태를 신종 혹은 점진 쿠데타라고 진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관건은 야권이 어떻게 정부·여당의 위기론에 대응하고 국가위기를 극복할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이다. 문재인 대표가 박근혜 정부 3년이 초래한 총체적 위기를 강조하고 그 극복 방향을 제시했지만, 이 주장들은 그의 대표직 사퇴 여부에 쏠린 관심 때문에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현 상황을 총체적 위기로 진단한 이후 내놓은 “무너진 민생의 벽돌, 민주주의의 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제자리에 놓아 무너진 대한민국을 복원하겠습니다”라는 방향은 정부·여당이 비상사태 운운하고 총선을 개혁 대 반개혁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준다. 벽돌을 하나씩 제자리에 놓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주어질지 의심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야권 내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과연 문 대표가 보여준 위기의식 정도라도 공유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승만 국부론”의 문제도 역사의식보다는 현 상황에 대한 안이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위기감각이 정부·여당보다도 둔하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야당 분열은 야당들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적당히 살아남기와 다른 야당에 대한 상대적 우위에 더 연연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총선 승리를 이야기하더라도 내심으로는 개헌 저지선이나 여당 180석 저지 정도를 최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 정도의 비전과 결기로는 국민과 유권자에게 국가위기를 극복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는 신뢰를 주기 어렵다. 야권에서는 국가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담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어떤 헌신도 할 것이라는 결기를 보여주는 사람과 세력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제 분열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경주해야 하며, 그 속에서만 진정한 총선 승리의 좁은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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