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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어느 겨울, 실내 공기가 너무 건조하다는 윗분 말씀에 가습기가 덜컥 생겼다. 윗분들의 책상과 공용 테이블에 귀여운 곰돌이와 개구리 모양의 가습기들이 자리를 잡았다. 개구리와 곰돌이의 두 귀에서 일제히 촉촉한 물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하자 확실히 사무실 공기가 촉촉해졌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출근해서 공용 테이블 위 가습기들에 물을 채운 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선배 한 명이 나를 불렀다. 부장님이랑 차장님들 책상 위에 있는 가습기는 왜 그대로 뒀느냐는 거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침마다 저 가습기들에 물을 채워놓고, 물이 떨어지면 그때그때 갈아줘야 한다고 했다. “각자 책상에 있는 건 알아서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했다가 “그걸 어떻게 부장님들한테 하시라고 하느냐, 이런 건 원래 여직원들이 하는 거다. 돌아가면서 알아서 해라” 한 소리 들었다. 설마, 싶어서 관찰해봤더니 (모두 남자인) 상사들은 가습기 물이 떨어졌는데도 아무도 물을 채우지 않았다. 하루를 버티던 나는 결국 백기투항했다. 매일매일 5개가 넘는 가습기에 물을 채워넣고, 물이 떨어질 때마다 갈다 보니 예쁘다고 좋아했던 가습기는 곧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 물건으로 변해버렸다. 빙긋 웃고 있는 곰돌이와 개구리의 표정마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심지어 몇 주 후에는 가습기를 돌리면 냄새가 나는 것 같으니 “물을 채울 때마다 깨끗이 닦아오라”는 지시까지 떨어졌다. “여직원들이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말이야”라는 말은 덤이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나는 그 지시를 내린 남자 상사보다 가습기 물이 떨어졌는데도 먼저 갈지 않는 동료 여직원이 더 미웠다.

그러니까 가습기를 사준다고 할 때 뜨뜻미지근했던 선배들의 반응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화장실에서 가습기를 닦고 있는 나와 마주친 선배 언니는 소곤소곤 털어놓았다. “말도 마, 사무실에서 왜 종이컵을 쓰는데. 원래 환경보호도 하고 부서 운영비도 아낀다고 다 개인컵 갖다놨었어. 근데 어떻게 됐게? 아침에 오자마자 스무 개가 넘는 컵 싹 다 걷어야지, 닦아서 다시 갖다놔야지, 커피 타다줘야지, 썼던 컵 다시 씻어서 갖다놔야지… 여직원들 있는 부서에서는 그게 다 여직원들 일이 된 거야. 결국 강력하게 항의 들어가서 다 종이컵으로 바뀐 거라니까. 아유, 말도 마. 그 많은 컵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타먹고 알아서 챙기면 좀 좋아?”

일을 한다고 모인 직장에서 이 정도니, 가정이나 일상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말할 것도 없다. 여자는 너무 많이 배워도 안되고(여자가 너무 똑똑해도 피곤하니까), 남편보다 많이 벌어도 안되고(남자 기 죽이니까), 화장을 진하게 해도 안되고(화장을 안 하면 “예의가 아니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뿐인가? 여성을 ‘모 아니면 도’로 분류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방식 역시 여전하다. ‘전업주부 VS 직장맘’ ‘된장녀 VS 개념녀’ ‘순종적인 여자 VS 드센 여자’ ‘미녀 VS 추녀’까지…. 여기에서 ‘드센 여자’의 대명사가 바로 ‘페미니스트’다. 사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젠더)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를 뜻하는 것인데도 이 같은 오해는 꽤나 공공연하다. 에마 왓슨 역시 유엔 연설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면 할수록 여성의 권리 확보를 위해 싸울수록, 남성 혐오와 같은 의미로 오해받곤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오죽하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증후군까지 생겼을까.

2010 지방선거 홍보용으로 제작되었다가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던 '선거탐구생활' (출처 : 경향DB)


지금 트위터에서는 ‘IS보다 페미니즘이 위험하다’는 칼럼이 논란이 되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캠페인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 점의 열이 있으면 한 점의 빛을 발하라.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루쉰의 말처럼, 작은 시작이지만 나 역시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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