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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특정한 기계장치가 인간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며 일상문화를 전면적으로 변모시킨 사건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주목한다면, 군 훈련소에서 갓 입대한 청년들이 총기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루기 시작하는 시점이나, 대규모 공업단지에서 산업 노동자들이 자동화 기계와 함께 작업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문화의 차원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어떨까.

198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진행된 자동차의 보급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1985년 55만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등록 대수는 88올림픽과 3저 호황을 거치면서 200만대를 넘어서더니, 1990년에는 338만대를 기록했다. 그리고 외환위기에 직면한 1997년에는 1000만대의 벽을 훌쩍 넘어섰다. 1990년대 전반에 걸쳐 차량 증가율은 연평균 12.2%로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의 위세였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은 단연 승용차였다.

도시 거주 인구가 전체 인구의 70~80%를 넘어서는 시점에 진행된 이러한 변화는 승용차의 문화적 의미도 변모시켰다. 이전까지 중상류층의 사치재로 특권적 지위를 확보했던 승용차는 배기량과 디자인에 따라 중산층 내부의 위계와 운전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내구 소비재로 새롭게 영역 확장을 꾀했다.

이를테면 1986년의 강남을 무대로 삼은 이홍의 소설 <나의 메인스타디움>(2010)을 보자. 여기에서 주인공인 초등학교 2학년의 아빠는 “이제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도 하고 올림픽도 한다는데, 좀팽이처럼 구닥다리 차를 타고 다닐 순 없어서, 이 아빠가 너희를 위해 근사한 차를 쫙 뽑아왔다”고 말하는데, 그 “근사한 차”는 바로 그랜저였다.

또한 승용차는 운전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공간 압축의 경험을 확산시키는 미디어이기도 했다. 초보 딱지를 떼고 차량과의 묘한 일체감을 맛볼 무렵이면, 운전자는 대중교통 이용자나 거리 보행자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도시의 시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구효서의 소설 <자동차는 날지 못한다>(1990)의 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를 탄 지 일주일밖에 안됐는데 참 다른 세상이 보이더라 이거야. 차를 타지 않았을 때는 생각지 못했던 전혀 다른 경험들이 새록새록 생기더라는 거지.”

현대에 이르러 얻게된 마이카 문화로 현대인들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민' 또는 '시민'의 자유와 거리가 먼 '이동'의 자유였다. (출처 : 경향DB)



한편 박완서의 소설 <저문 날의 삽화 4>(1987)에서는 승용차가 ‘자유’의 상징으로 의미화되기도 한다. 조카들의 마이카족 행세가 못마땅했던 50대 후반의 여성은 “차가 곧 자유”라는 한 조카의 말을 듣고선 “빈속에 마신 맥주의 첫 잔처럼” 짜릿함과 상쾌함을 느낀다.

그녀가 살아온 삶 속에서 ‘자유’란 “맨 존엄하고 비통하고 난해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유’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기껏 “자유 그것 아니면 죽음을 달라”나 “자유에서는 왜 피의 냄새가 나는가”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조카에게 자유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속도와 방향의 선택을 통한 물리적 이동의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추상적 관념이었던 ‘자유’가 마이카를 경유해 일상의 구체적 차원으로 착지하는 순간을 목격하면서, “자유가 그런 손쉬운 지름길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이동의 자유란 ‘국민’의 자유나 ‘시민’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화를 경험하며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소비자’의 자유에 가까웠다. 승용차는 소비를 욕망케 하는 사물이면서 동시에 소비문화의 첩경으로 인도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실제로 운전자들이 가족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당도한 곳은 도심 광장이나 집회 장소가 아니라 도시 외곽의 대형 할인매장이나 지방의 관광명소였다.

이렇게 ‘이동’의 자유가 휩쓸고 지나가자 ‘항해’의 자유가 그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컴퓨터의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통해 ‘소비자’를 ‘사용자’로 전환시키며 일상문화를 재구성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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