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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박 대 백’

opinionX 2019. 7. 12. 10:17

대구·경북의 소문난 맛집에 가면 어김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이 맞이할 때가 있었다. 박 전 대통령과 악수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음식점 주인의 사진을 보자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2016년 탄핵 국면을 지나면서 슬그머니 사진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이 있던 자리는 철 지난 바닷가처럼 한동안 휑하니 비어 있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한 맛집에 들렀더니 그 자리를 <백종원의 삼대천왕> 사진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박근혜에서 백종원으로!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대구·경북의 모든 음식점에 <백종원의 골목식당> 사진이 걸리는 날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박의 국가언어’로 살던 대구·경북 사람들이 ‘백의 시장언어’로 살아가는 날을 상상해본다.

‘박’은 모든 문제를 중앙정치 탓으로 돌리는 국가언어를 상징한다. 지역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고 투덜대면서도 지역 스스로 해결할 생각 대신 대구·경북 출신의 유력 정치인만 바라본다. 제발 대기업을 유치해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줬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모델이다. 고속도로 만들고 중공업에 투자해서 지역경제를 일으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똑같이 해주리라 바랐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이 모든 게 종북좌빨이 방해한 탓이다. 뿌리를 뽑아버려야 할 텐데, 정말 자유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된다.

‘백’은 기업가로 자신을 변화시켜 살아가려는 시장언어를 대표한다. 백종원은 영세식당 주인에게 자기를 교정, 치료, 계발, 혁신해야 할 부실기업으로 보라고 다그친다. 더 나아가 문제투성이인 자신을 우량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자기계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라고 말한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불확실성을 오히려 자유를 실현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기업가적 주체가 되라고 가르친다.

현재 대구·경북에는 박에서 백으로 변화할 징조가 여전히 보잘것없다. 오히려 맛집 행세하며 시장언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십수년 전 대구로 이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을 때다. 외국에서 살던 친구가 사업차 대구를 방문한 김에 나를 찾아왔다. 회포를 풀러 삼겹살집에 마주앉았다. 2인분을 시켰더니 3인분부터 주문을 받는다는 예상치 못한 응대가 나왔다. 저녁을 먹고 왔으니 안주용으로 2인분만 달라고 호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둘이 오면 2인분 시키는 것이 정상인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다. 1인분 값이 싸기에 밑반찬 생각하면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이란다. 손님이 주인 돈 벌어주기 위해 있는 것인가? 고깃집이 여기밖에 없냐며 호기롭게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다른 곳도 다르지 않았다.

그 이후 비슷한 일을 거듭거듭 겪었다. 이제 둘이 삼겹살집에 가면 아주 자연스럽게 3인분을 시킨다. 저항하다가 지역 습속에 젖어든 것이다. 최근에도 이러한 습속은 여전히 막강하다. 어떤 집은 일단 3인분 시켜야 하고, 그 후부터 새로 주문할 때는 무조건 2인분이 기준이다. 더 먹고 싶으면 결국 5인분을 주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가 막혀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다. 주변의 고깃집에서 항의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습속이란 사실상 막강한 제재를 담고 있는 지역의 담합인 셈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시장이 사회적 유대를 산산이 부수고 시민을 이기주의자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으로 가득하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유용성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환 당사자들이 서로 경쟁할 때 시장이 존재하게 된다.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위계’에 의한 내부자거래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습속’에 의한 교환은 경쟁을 제한한다. 그런 점에서 그곳에는 시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오로지 시장에서만 교환을 위한 경쟁 과정을 통해 교환 당사자들의 유용성에 대한 욕망이 호혜적으로 충족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위계와 습속을 통해 교환해온 대구·경북 일상의 삶에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은 셈이다.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거나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의해 포획되었다고 선험적으로 질타하기 전에 대구·경북 일상의 삶을 톺아보아야 할 이유다. 나는 묻는다. ‘박대백’은 과연 대구·경북 일상의 삶에 시장언어가 비로소 침투해 들어가는 작은 낌새인가?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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