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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희정입니다. EBS <까칠남녀> 종방 후 1년 만입니다. 공중파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 여전히 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유튜브로 돌아왔습니다. 퀴어와 퀴어 앨라이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본격 퀴어 토크쇼 <손희정의 TMI>.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2019년 1월 초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기획, 제작하는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에서 론칭한 <손희정의 TMI> 첫 녹화 날이었다.

전문 방송인도 아닌데 토크쇼 진행이라니.

이 어색한 만남의 시작은 201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육방송 EBS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보수 기독교를 필두로 반동성애 진영의 사람들이 “교육방송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방송사 앞에 모여 한 달 가까이 EBS 규탄 집회를 지속하고 있었다. EBS로서는 개국 이래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증오와 악의를 대면하는 순간이었을 터다.

그들은 심지어 “EBS가 음란 방송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며 당근에 콘돔을 씌워 방송사 로비에 세워져 있는 (EBS 최고의 인기 캐릭터인) 방귀대장 뿡뿡이에게 던지기도 했는데,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음란한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그토록 홀리한 분들이 어쩌다 이토록 음란한 행위를 하시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EBS에서 제작하고 있었던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가 2017년 12월25일과 2018년 1월1일 이틀에 걸쳐 <성소수자 특집 - 모르는 형님>을 방영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레즈비언(L),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인 게이(G), 양성애자인 섹스 칼럼니스트(B), 그리고 변호사인 트랜스젠더(T)가 출연하여 LGBT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쾌활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말이다.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반동성애 진영이 강하게 반발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 때문에 <까칠남녀>에 출연 중이던 양성애자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이 하차당하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공영방송이 혐오 선동에 이처럼 쉽게 넘어갈 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결국 은하선 하차에 불복한 일부 패널이 출연을 거부하면서 방송은 애초 계획된 회차를 다 채우지 못하고 허망하게 종영되었다.

당시 <까칠남녀>에 출연하고 있었던 나는 2017년 12월26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 지면에서 성소수자 특집 방송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때때로 “성소수자가 도대체 무슨 차별을 당하느냐”고 묻지만, 성소수자가 한국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썼다. 그리하여 칼럼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백래시가 시작되기 전에 썼던 글이었지만, 결국 <까칠남녀> 케이스는 안타깝게도 내가 칼럼에서 했던 말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어버렸다. “당신들이 뭘 하고 살아도 상관없지만, 내 눈에만 띄지 말아라.” 성소수자 특집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다.

그로부터 1년이 훌쩍 지난 오늘. 큐플래닛을 소개하기 위해 쓰고 있는 이 칼럼의 제목은 <‘보이는 것’이 들려드릴 이야기>다.

우리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로부터 한 사회의 한계를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회가 지우려고 하는 존재들이 부득부득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기 시작할 때, 그 ‘보이는 것’이 들려줄 이야기의 힘은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우리는 아직 그 가능성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큐플래닛의 또 다른 프로그램 <퀴어 업데이트>에는 <까칠남녀>의 은하선 작가와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신필규 활동가가 출연한다. 이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와 오해를 차근차근 풀어보는 방송이다.

‘보이는 것’을 통해 비로소 듣게 될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이 큐플래닛의 ‘구독’ 버튼을 누르실 시간이다.

<손희정 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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